입시 경쟁의 원류, 왕조시대 과거
황제권 강화와 맞닿은 '권학문'
작금의 정치인, 자기부터 돌아봐야
한·중·일 삼국의 교육열은 지구촌이 알아준다. 물론 긍정적인 측면이 많지만, 입시와 관련해서는 재고할 부분도 적지 않다. 특히 '대입'을 둘러싼 과열현상은 문제가 큰데, 아무래도 왕조시대의 '과거(科擧)'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과거제도는 6세기 말 중국 수(隋)나라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애초에는 귀족세력의 세습제를 무너뜨리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새로운 제도를 무시하거나 못마땅해하던 귀족들이 당나라 중기부터 그 효용을 깨닫고 적극 참여하자,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시험에 붙어야 출세한다는 의식이 보편화되었다. 당시 유럽의 봉건 세습 사회와 비교할 때 분명히 앞선 모습이지만, 인간사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기 마련이다.
당나라 중기의 관료이자 학자인 조광(趙匡)은 '선거의(選擧議)'라는 글에서 과거제도의 10가지 폐단을 지적하였는데,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 과거시험이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은 따지지 않으니 배우는 것은 쓸모가 없고 쓸모 있는 것은 배우지 않아, 관리들 가운데 맡은 직무를 감당하는 자가 적다.
둘, 지식인들은 고관들을 찾아다니며 끌어줄 것을 청하고, 자기와 같은 무리를 비방함으로써 앞자리를 다툰다.
셋, 매년 초가을에 장안으로 길을 떠나서 늦봄에야 돌아오고 제대로 쉬지도 못한 가운데 또 금방 가을이 다가온다. 그러니 제대로 된 공부는 하지도 못하고 천박한 재주만 더 부리게 된다. 가난한 자들은 여비조차 감당할 수 없다."
이런 부작용에도 급제에 대한 열망은 식지 않았다. 대표적 인물이 당나라의 조송(曹松)이다. 그는 70이 넘어 진사에 급제했는데, 늙을 때까지 평생 응시했다는 점을 고려해 특별히 급제시킨 것이었다. 즉 실제로 붙은 것이 아니라 감투(敢鬪)상을 받은 셈이다. 그래서인지 그가 남긴 "황제의 부름을 받았지만 자꾸만 눈물이"라는 글귀는 처연하기까지 하다.
황제들은 과거시험을 통치에 이용했다. 관직에 대한 열망이 클수록 자신의 권력이 공고해진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에서 교양 필독서로 통했던 '고문진보(古文眞寶)', 그 첫머리에 실린 송나라 진종(眞宗)의 '권학문(勸學文)'은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그 시대 '공부'와 '출세'의 실체를 드러내 비판의 대상이 되곤 한다.
"부자가 되려고 옥토를 살 필요가 없으니, 책 속에 천 석의 쌀이 절로 있도다. 편안히 살려고 호사스런 집을 지을 필요가 없으니, 책 속에 황금의 집이 절로 있도다. 문을 나섬에 시종이 없음을 한탄하지 말라. 책 속에 수레와 말이 즐비하게 있도다. 아내를 얻을 때 좋은 중매가 없음을 한탄하지 말라. 책 속에 여인이 있으니 얼굴이 옥과 같도다. 남아로 태어나 평생의 뜻을 이루고 싶거든 경전을 창 앞에 두고 부지런히 읽으라."
제목은 '학문을 권장한다'인데, 부귀영화를 원하면 과거에 합격하여 관료가 되라는 말이다. 그가 언급한 경전은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으로, 1만1,705자의 '논어'부터 시작하여, 19만6,845자의 '춘추좌전'을 마칠 때까지, 합계 43만여 자를 시험에 붙는 그날까지 읽고 외워야 했다. 나라님까지 나서서 과거를 권유하니, '입신양명'이라는 허망한 꿈을 품고 일생을 허비하는 사람도 늘어만 갔다.
명나라와 청나라에 들어와서는 인구의 자연 증가로 응시자가 기하급수로 늘었다. 관직은 한정되었기에 과거에 붙고도 벼슬을 못 받는 사람이 속출했다. 기능을 상실한 과거제도는 시효를 다한 학문과 함께 1904년을 마지막으로 청나라에서 사라졌다.
우리도 '과거'에 목을 매던 세월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작금의 정치판에도 '한자리' 하기 위해 추태를 벌이는 위인들이 많다. 개인의 자유겠지만, 제발 실력과 상식을 갖춘 전문가들이 나서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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