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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 광산의 기적은 물·산소·빛 그리고 '이것' 덕분이었다

입력
2022.11.07 04:30
수정
2022.11.07 07:45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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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년 경력 베테랑 박정하씨 기지 발휘
갱도 무너지자, 매뉴얼 기억해내 대피
모닥불에 전기포트 철판 달궈 물 데워
믹스커피 녹여 양 늘리고...조명도 절약
혼자 아닌 둘..."마음 단단히" 서로 의지

5일 정오께 경북 안동병원에서 봉화 광산 매몰 생환 광부 박정하(62ㆍ오른쪽) 씨가 보조작업자 박씨(56)와 대화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5일 정오께 경북 안동병원에서 봉화 광산 매몰 생환 광부 박정하(62ㆍ오른쪽) 씨가 보조작업자 박씨(56)와 대화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공기가 들어오는 쪽으로 대피하라. 물이 흐르면 물이 나오는 쪽으로 대피하라. 공간을 이용해 기다려라.’

경북 봉화 아연광산에서 작업 도중 매몰됐다가 극적으로 구조된 박정하(62)씨와 보조작업자 박모(56)씨는 지하 190m 공간에서 221시간 동안 평소 숙지하던 갱도사고 시 행동요령을 한 치의 오차 없이 따랐다.

광산 경력 27년의 베테랑 작업반장 박정하씨는 어디선가 ‘우당탕탕’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자, 황급히 보조작업자 박씨를 데리고 대피소로 피했다. 발 빠르게 피한 대피소는 갱도 안에서도 여러 개 통로가 모이는 고속도로 인터체인지 같은 곳으로, 면적이 100㎡ 이상으로 널찍했다. 낙석 때문에 지상으로 연결된 수직통로는 꽉 막혔지만, 갱도 내 가장 많은 통로와 연결된 공간으로 피한 덕에 모닥불을 피울 정도로 산소는 충분했다.

공기 다음으로 생존에 필수적인 물도 넉넉했다. 챙겨간 10리터 물이 확보돼 있었고, 벽과 천장에도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오히려 물이 너무 많아 걱정이었다. 갱도 내부 온도가 평균 14도에 불과했기 때문에 물에 젖으면 체온이 더 떨어질 수 있었다. 두 광부는 고여 있는 물을 피하려고 갱도 내 흩어져 있는 널빤지를 바닥에 깔아 놓기도 했다.

광부들의 간식인 믹스커피 30봉은 더할 나위 없이 귀한 비상식량이 됐다. 의학계에 따르면, 극한 상황에서 인간은 공기 없이 3분, 물 없이는 3일, 음식 없이는 3주 동안 생존할 수 있다. 믹스커피 한 봉의 열량은 50kcal로, 성인 남성의 하루 섭취 열량(2,000kcal)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당류와 포화지방 등의 영양소가 들어 있고 체내 전해질의 균형을 조절해주는 나트륨도 소량 포함돼 있다. 게다가 30봉을 한번에 먹지 않고, 약을 복용하듯 3일치로 나눠 마셨다. 두 광부를 치료 중인 방종효 경북 안동병원 신장내과 과장은 “30봉지를 식사대용으로 먹었다고 한다”며 “10일간 굶었는데도 건강상태가 나쁘지 않아 믹스커피가 상당히 도움이 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갱도 안에 나뒹굴던 비닐과 산소용접기, 평소 소지했던 작은 라이터도 생존에 큰 도움이 됐다. 두 광부는 비닐로 작은 텐트를 만들어 냉기를 차단했고, 젖은 나무 토막을 가져와 말린 뒤 산소용접기로 모닥불을 피워 공기를 데웠다.

불은 믹스커피 양을 늘리는 데도 요긴하게 쓰였다. 현장에서 전기포트를 발견한 두 광부는 기지를 발휘해 아래 철판을 뜯어 내고 모닥불에 달군 뒤 물을 데웠고, 믹스커피를 녹이고 천천히 마시며 배고픔을 달랬다.

고립된 광부 2명이 열흘이나 버텼던 대피장소.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비닐을 두르고 장작불을 피운 흔적이 생생하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고립된 광부 2명이 열흘이나 버텼던 대피장소.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비닐을 두르고 장작불을 피운 흔적이 생생하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안전모에 달린 조명도 어둠 속 공포를 덜어내는 데 큰 힘이 됐다. 두 사람은 조명도 아껴 사용했다. 꼭 필요할 물건이나 탈출구를 찾을 때만 잠시 켰다가 이내 끄고 남은 시간은 모닥불의 작은 불빛에 의존했다. 그러나 매몰 10일째 조명마저 수명이 다해 깜박거리자, 두 광부는 절망감에 빠졌다.

박정하씨의 아들은 “모닥불을 피워놓고 있었지만 랜턴이 방전돼 어둠이 찾아오니, 큰 두려움을 느꼈고 ‘서로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다’고 하시더라”며 “낙담하기 시작한 그때, 구조대 불빛이 비췄고 기적처럼 구조돼 진짜 빛을 보셨다”고 말했다.

혼자가 아니라 두 사람이 함께 머물렀던 것도 심리적 안정을 얻는 데 도움이 됐다. 1967년 작업 도중 매몰돼 368시간 만에 구조돼 국내 매몰 생존자 중 역대 최장 사례로 기록된 양창선(당시 36세)씨는 홀로 고립됐지만, 지상과 통신이 가능해 교신하며 큰 위안을 얻었다. 실제로 보조작업자 박씨는 사고가 난 광산에서 일한 지 4일밖에 안 된 신입사원으로, 매몰 당시 크게 불안해했지만 베테랑인 박정하씨가 다독이면서 진정될 수 있었다. 박정하씨 아들은 “두 분이 갱도 안에서 서로 ‘마음을 단단히 먹자,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는 얘기를 나눴다고 한다”며 “병원 1인실에서 각자 편하게 치료받을 수 있는데도 두 분 모두 같이 있겠다고 해서 여전히 2인실에 머물고 있다”고 전했다.


봉화= 김정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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