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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하기 전에, 눈물 흘리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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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희생자인가? 이태원 사고 사망자인가? 아니면 박희영 용산구청장 말대로 이태원 현상인가? 정부는 이태원 핼러윈 참사 이튿날,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회의에서 ‘참사’ 대신 ‘사고’로, ‘피해자’ 대신 ‘사망자’로 용어를 통일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지난 3일 더불어민주당 소속 단체장들은 ‘이태원 참사 희생자 명칭 쓰기’에 돌입했다. 이들은 합동분향소 현수막 문구를 ‘이태원 사고 사망자 합동분향소’에서 ‘이태원 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로 교체했다.
참사, 사건, 현상. 이토록 비극적인 일 앞에서 이런 명칭 논란이 언어 놀이처럼 보일지언정, 우리는 알고 있다. 이 일을 명명하는 것이 애도의 시작이라는 걸, 제대로 호명하지 않고서는 눈물조차 흘릴 수 없다는 걸 말이다.
‘참사’와 ‘피해자’라는 단어가 쓰일 때만이 우리는 ‘책임’과 ‘원인’에 대해 물을 수 있다. 피해자가 있으면 가해자가 있고, 참사가 있으면 책임자가 있다. 누군가의 말대로 이것이 자연현상을 일컬을 때 쓰는 ‘현상’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떨까? 번개가 치고 비가 내리는 것을 두고 누구에게 책임을 묻겠는가? 우리는 다만 가뭄 앞에 선 무력한 부족장처럼, 막연히 신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해 제사나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책임과 원인이 필요한 이유는 그래야만 대책과 방지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왜?”라는 유족들의 단순하고 처절한 질문에 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 '밀양'은 어느 날 갑자기 아들을 잃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다. 납치 사건으로 아들을 잃은 주인공 신애는 어두운 절망 속을 기어 다닌다. 그녀에게는 이 모든 비극에 대한 이유가 필요하다. 왜? 아들이 죽어야 했는가? 왜? 내 아들이어야 했는가? 왜? 그렇게 죽어야 했는가? 약국 의사가 말한다. 세상의 모든 일에는 다 주님의 뜻이 담겨 있다고. 이 햇볕 한 줌에도 주님의 뜻이 담겨 있다고. 신애는 열성적인 기독교인이 되고, 비로소 제정신을 찾는다. 가해자를 용서할 마음을 먹을 정도로 말이다. 그녀가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이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으니까. 그녀의 아들은 아무 이유 없이 죽은 게 아니니까. 이유를 찾기 위해 종교를 선택한 그녀에게 누가 비난의 말을 할 수 있을까?
인간은 삶의 이유를 찾지 못하느니, 차라리 고통 속을 헤매길 선택한다. ‘이유 없음’은 때로는 상실보다 더 우리를 괴롭힌다. 이태원 참사는 왜 일어났을까? 피해자들은 왜 그렇게 죽어야 했을까? 유가족들의 질문은 마땅하며, 이 사회는 그 질문에 답할 책임이 있다. 왜라는 질문에 답하고 나서야, 우리는 제대로 된 애도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유가족들이 오기도 전에 서둘러 언론에 배포할 사진부터 찍고 간 이는 모르겠지만, 눈물에도 차례가 있고 애도에도 순서가 있다.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자. 종교 속에서 구원을 얻은 신애가 다시 그 종교를 놓아버리게 되는 사건이 생긴다. 그녀의 아들을 죽인 살인자가, 자신은 이미 참회했고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노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 엉뚱한 용서의 차례 속에서 신애는 두 번째로 무너진다. 이태원 참사는 어떠한가? 책임자는 용서를 비는 방향에 있어야지, 그 용서를 받는 방향에서 슬픔과 애도로 치장하고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우리는 끝까지 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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