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보

단독

'지옥 같은 싸움'에 절박함이 없다

입력
2022.10.31 04:30
26면
구독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5월 16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시정연설을 하고 있다. 이 자리에서 윤 대통령은 연금·노동·교육 개혁을 3대 과제로 제시했고, 이를 위한 협치를 강조했다. 서재훈 기자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5월 16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시정연설을 하고 있다. 이 자리에서 윤 대통령은 연금·노동·교육 개혁을 3대 과제로 제시했고, 이를 위한 협치를 강조했다. 서재훈 기자

"개혁은 박수를 받으며 시작하지만, 막상 추진하게 되면 지옥 같은 싸움이 벌어진다."

2015년 한국을 방문한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가 했던 말이다. 모든 정부가 집권 초기 개혁의 깃발을 올리지만, 기득권층과 이해 관계자들의 거센 저항에 직면하게 되고, 결국 열에 아홉은 실패할 정도로 개혁 작업이 쉽지 않다는 이야기다.

윤석열 정부도 나름 비장한 각오로 '지옥 같은 싸움'을 벌일 태세였다. 지난 5월 윤 대통령은 국회 시정연설에서 우리 사회의 지속 가능성을 위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로 연금·노동·교육 개혁을 꼽았다. 진즉 개혁이 이뤄졌어야 할 해묵은 과제들이지만, 역대 정부가 손조차 대지 못했거나 개혁을 추진하다 실패했던 것들이다.

특히 윤 대통령이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보수당과 노동당의 전시 연립내각을 언급하며 협치를 강조한 대목은 매우 고무적이었다. 국회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개혁 과제들이 거대 야당의 협조 없이 진행할 수 없는 게 이유였겠지만, 그런 자세라면 지속적으로 국민을 설득하고 기득권 세력의 반발을 무력화해야 하는 '지옥 같은 싸움'도 해낼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아쉽게도 딱 거기까지였다. 윤석열 정부의 개혁 시계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기회 있을 때마다 대통령과 여당은 3대 개혁의 절박함을 강조하고 있지만, 국민이 체감하는 변화는 거의 없다.

가장 논쟁적인 게 연금 문제인데, 지금 개혁하지 않으면 우리 사회가 파국을 맞을 거라 경고하는 정부가 정작 뭘 어떻게 바꾸겠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지난 국감 때 보건복지부 장관이 "연금개혁 정부안을 내년 10월까지 제출하겠다"고 밝힌 게 그나마 구체적인 로드맵이다. 그런데 내년 10월은 22대 총선(2024년 4월)을 6개월 앞둔 시점이다. 총선에 올인할 정치권이 유권자에게 인기 없는 연금개혁을 치열하게 논의할 거라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미래인재 양성과 교육격차 해소를 내건 교육개혁, 주52시간제 등 근로시간 제도와 임금체계 개편 등을 과제로 삼은 노동개혁은 그나마 정부가 뭘 하려는지 알 수 있는 분야다. 그러나 개혁 성공의 전제조건인 사회적 대타협을 기대하긴 어려운 상황이다. 중장기 교육과제를 논의할 국가교육위원회의 이배용 위원장과 노사정 대화를 위한 경제사회노동위원회의 김문수 위원장은 각각 편향된 역사관과 극우 발언으로 논란이 된 인물이다. 구시대를 대표하는 인사들에게 미래 세대를 위한 개혁 논의를 맡긴 것도 납득할 수 없지만, '설득과 조정'의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을 기용한 것은 불과 몇 달 전 윤 대통령이 강조한 개혁의 절박함과 협치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만든다.

이런 상황 때문에 정부 안팎에선 벌써 '3대 개혁은 물 건너갔다'고 보는 이가 적지 않다. "이 정부의 정치적 업적은 대통령실의 용산 이전과 여성가족부 폐지(이것 역시 지금의 여야 대치 상황이라면 장담할 수 없다)뿐"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다음 달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6개월을 맞는다. 시간이 많이 남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협치와 거리가 먼 국정 운영, 절박함도 전략도 없는 개혁 작업, 인사 난맥상, 그로 인한 낮은 지지율로는 아무리 많은 시간이 남아도 개혁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한준규 정책사회부장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