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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드남'은 어떻게 주인공 자리를 꿰찼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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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문화를 읽습니다. 역사 에세이스트 박신영 작가는 '백마 탄 왕자' 이야기에서 장자상속제의 문제를 짚어보는 등 흔히 듣는 역사, 고전문학, 설화, 속담에 배어 있는 성차별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번갈아 글을 쓰는 이한 작가는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 활동가'로서 성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남녀가 함께 고민해 볼 지점, 직장과 학교의 성평등 교육 현장의 이야기를 담아냅니다.
"너드미를 아시나요?"
요즘 친구들 사이에서는 ‘너드미’가 각광 받고 있다. 약간 찌질한 듯하면서도 불쾌하지 않아 순수하게 느껴지고 자신의 본업 또는 관심사에 몰입하느라 어디 가서 이상한 짓 하고 돌아다니지 않을 것 같은 매력의 너드남을 자신의 이상형 또는 롤모델로 삼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실로 다양한 미디어에서도 기존 남성 주인공과 다른 매력의 너드남이 등장하고 있다. 영화 '신비한 동물사전'의 주인공 뉴트가 그러하며 우리들의 친절한 이웃 '스파이더맨'의 피터 파커(특히 토비 맥과이어의 피터 파커), 국내에는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 등장하는 ‘최택’이 있다. 모두 사회성은 조금 떨어지는 ‘아싸’(아웃사이더)스러운 면이 있지만, 한편으로 자신의 전문성을 갖추고 있는 반전매력이 있는 인물들이다. 흥미로운 일이다. 이 ‘아싸’들은 어떻게 사람들의 호감을 사 주인공 자리를 꿰차게 됐을까?
너드남이 각광 받기 시작하면서, 간혹 뜬금없이 용기를 얻어 자신의 너드한 면모를 여과 없이 보여주는 이들이 있다. 안타깝지만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 너드미의 완성은 찌질한 태도, 행동이 아니라 그 무해함에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애정하는 사람 앞에서 어색, 쑥스러워하며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거나 뚝딱이는 모습은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너드남의 주요 매력 포인트 중 하나다.
허나 애정하는 사람만이 아닌 모든 여성 앞에서 얼어붙어 잘 교류하지 못하고 친절하게 건넨 미소에 혼자 오해하여 손자 손녀 이름까지 지어준다면, 그건 그저 모든 여성을 잠재적 연애 대상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고백일 뿐, 매력도, 자랑도 아니다.
자신의 직업과 관심사에 푹 빠져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조잘조잘 이야기하는 모습 역시 많은 사람들이 너드남에게 코피 쏟는 지점 중 하나다. 근데 그 말들 사이에 “오빠가~”를 들먹이며 상대를 가르치려 드는 맨스플레인이 섞여 있다면? 천 년의 욕정도 짜게 식고 만다. 중요하니까 다시 한번 강조할 테니 밑줄 긋자. 너드남의 매력은 ‘찌질’이 아닌 ‘무해함’에 있다. 관계에 있어 미숙하지만 폭력과 거리가 멀고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는 점이 너드남이 각광 받는 이유다.
너드남이 대세로 떠오르게 된 데에는 기존 유해한 남성문화에 대한 반작용이 있다.
내가 보고 또 함께 자라 온 남성들 사이에는 늘 위계가 있었다. 첫 만남부터 나이를 물으며 형, 동생으로 호칭정리를 해야 했고, 학교와 군대, 직장 동료, 심지어는 그냥 동네 친구들 사이에서도 셋 이상만 모이면 그 안에는 늘 알게 모르게 위계가 자리했다. 그 위계는 대체로 완력이 크게 작용했고 경제력도 결코 무시할 수 없었으며 때로 공부나 유머 등으로 변하곤 했으나 늘 위계질서가 형성되었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변하지 않는 일이었다.
이를 테면 오늘날 인터넷에 떠도는 ‘상남자’, ‘하남자’ 하며 구분 짓고 조롱하는 놀이문화 역시 이런 태도와 무관하지 않다. 상남자를 우습게 그리지만 선망하고 하남자를 멸시하며 자조한다. 그 피라미드 같은 위계질서 안에서 탈락은 곧 소외와 폭력의 대상이 됨을 의미했기에 악착같이 한 걸음 더 올라가려 발버둥 쳤다. 허나 견고한 위계질서는 늘 탈락의 공포를 선사하고 사회에서 요구하는 남성성의 가치를 수호하기 위한 싸움은 고단할 뿐 아니라 지속 불가능하기에 결국 이들은 만만한 이들을 깎아내리며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는 전략을 자주 채택해 사용하고는 했다. 개중에서 ‘여성’은 늘 손쉬운 대상이었다. 모든 남성이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곁에 김치녀, 된장녀 등으로 여성을 멸시하거나 ‘ㅗㅜㅑ’(‘오우야’를 뜻하는 모음으로 주로 성적인 장면이 나올 때 인터넷에서 자주 사용하는 감탄사)를 입에 달고 다니며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고 이른바 ‘야동’에 능한 친구가 한 명쯤은 늘 있었다. ‘이상한 애’, ‘웃긴 애’로 치부될지언정 그 친구의 존재와 행동은 제약받기는커녕 웃음 속에서 권장됐다.
학교에서, 회사에서, 군대에서, 아니 어느 곳 하나 특정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곳에서 유사한 양상으로 나타났던 단톡방 성희롱 사건은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여성혐오로 남성연대를 공고히 해왔던 남성문화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자신과 친밀한 관계에 있던, 혹은 연인 관계의 사람조차도 채팅창에서는 동등한 사람으로 대우받지 못하고 그저 외모로 품평되거나 성적인 대상으로 취급됐다. 분명 그 단톡방의 모든 이들이 혐오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불편함을 느끼는 이들조차도, “남자가 그럴 수도 있지 뭘 쪼잔하게 굴고 그래”라는 한마디에 침묵하게 만드는, 단톡방을 뛰쳐나올 수 없게 만드는 그런 보이지 않는 힘이 너무나 강력하게 늘 작용하고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내가 기억하기로는 아주 어린 시절, 학교와 TV 등 온 세상에서 이러한 남성문화는 계속 권장됐다. 성적이 오르면 부인의 얼굴이 바뀔 것이라는 말, 남자는 능력만 좋으면 여성이 줄을 설 것이라는 이런 말은 어떤 가수들이 비싼 목걸이와 시계, 돈다발, 차와 함께 여성을 배경으로 노래하는 뮤직비디오에서 강렬한 이미지로 구현됐다. 채널만 돌리면 등장하는 수많은 연애 예능은 남성의 경제력을 부각하고 호사가들은 나이 많은 남자가 어린 여성과 결혼하는 것을 ‘능력이 좋다’고 표현했다. 이런 문화에서 여성은 사람이기보다 남성의 능력으로 취해지는, 능력을 빛내주는 트로피에 가까웠다.
'인셀(Incel, Involuntary Celibate)'은 비자발적 순결주의자라는 뜻으로 연애시장에서 도태된 이들이 스스로를 자조적으로 부르는 표현에서 비롯됐다. 국내에서는 ‘모쏠’(모태솔로)로 부르며 자조하는 게 이와 비슷하다. 그저 안타까운 존재로 생각될 법도 한 이 인셀이 사회적 문제로까지 여겨지게 된 데에는 그들의 자조와 냉소가 비단 인터넷문화에서만 그치는 게 아니라 각종 여성혐오 표현과 범죄로 이어지면서다. 인셀 범죄 특성상 그들의 조직 내에서 이러한 범죄 가해자가 영웅시되고 또 재생산될 수 있기에 구체적인 범죄와 범죄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겠다. 다만 이들의 다분히 선택적이고 왜곡된 분노의 근간은 결국 앞서 언급한 남성들의 위계질서 및 여성혐오로 유지되는 남성문화와 연결되어 있다.
남성연대의 위계질서는 힘, 경제력 등 각종 권력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서 이들을 배척하고 폭력의 대상으로 취급해왔다. 그 와중에 여성혐오문화는 그대로 전승되어서 ‘비자발적 순결’이라는 표현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 여성을 동등한 존재로 관계 맺지 못하고 그저 성관계의 대상으로만 취급했다. 남성연대의 폭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여성혐오는 그대로 간직한 이들의 왜곡된 분노는 애먼 소수자, 약자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최근 국내에서 나타나는 젊은 남성 사이의 소수자를 향한 혐오 양상은 이러한 문제가 그저 일부만의 이야기로 취급하며 쉬쉬해 넘길 수 없는 지경이 되고 있다는 신호다.
다시 너드남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너드남이 각광 받는 현실은, 앞서 언급된 유해한 남성문화 사이에서 이에 가담하지 않는 남성의 등장을 촉구하는 흐름에 있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비단 더 멋지고 인기 있는 남성성과 이 흐름에 제대로 편승하지 못하고 도태되어야 할 남성성 정도의 이야기로 취급되지 않았으면 한다. 대신 그간의 혐오적인 남성문화에 대한 성찰과 더불어 더 나은 남성문화를 만들기 위한 고찰로 이어졌으면 한다.
예컨대, 단톡방에 올라온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사진들에 무심히 넘어간 적은 없었나, 술자리에 오간 이야기들 중에 여성동료가 있었더라면 하지 않았을 말들은 없었나 자문해볼 수 있었으면 한다. 나아가 형, 동생에 연연하지 않는 위계 없는 남성문화는 어떤가? 여성을 성적으로만 바라보지 않고 나와 동등한 인간으로 대우하는 태도는? 조롱과 경쟁 대신에 서로를 돌보는 남성이 낯설지 않은 현실을 꿈꾼다. 가부장적이고 여성혐오적인 남성문화에 균열을 만드는 무해한 너드남이 그 변화에 시작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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