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고르 레비트: 시민, 유럽인, 피아니스트

입력
2022.10.27 20:00
25면
이고르 레비트. AP 연합뉴스

이고르 레비트. AP 연합뉴스

다음 달 15일, 피아니스트 이고르 레비트가 드디어 한국 무대에 오른다. 그의 홈페이지를 방문하면 짤막한 자기소개가 휘장처럼 걸려 있다. '시민. 유럽인. 피아니스트(Citizen. European. Pianist)'인데, 음악가로서의 정체성을 3번째에 호명하는 것이 흥미롭다. 하루에도 몇 번씩 업그레이드되는 레비트의 SNS는 클래식 음악계의 보수성에 딴청 부리며 문화적 잡식성을 드러내길 마다하지 않는다. '섣불리 이고르 레비트를 예측하려 들지 말라'는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의 충고처럼 그의 대담한 행보는 음악계를 뛰어넘는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게다가 최근 코로나의 격변을 겪으며 그가 음악을 전달하는 방식은 한층 더 레비트스러워졌다.

감염병으로 모두가 움츠렸던 동안 레비트는 온라인 스트리밍 콘서트를 돌파구로 삼았다. 연주 공간이, 자물쇠를 걸어 잠근 콘서트홀에서 베를린 아파트의 거실로 진화한 것이다. 비대면 콘서트의 첫 곡은 이번 내한 공연의 마지막 곡으로 연주할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발트슈타인'이었다. 연주를 시작하기 전, 카메라를 바라보며 이렇게 운을 띄웠다. "슬프고 괴이한 시절이지만, 아무 것도 연주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동기 부여가 절실히 필요했어요. 계속 연습하며 생존하기 위한."

랜선으로 연결된 그의 청중들은 국적과 나이, 계급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활발히 확장되었다. "저의 거실엔 약 230만 명의 청중이 함께 했습니다. 격식에 메인 연주의상 따위는 필요치 않았어요." 실제로 레비트의 추종자들은 그의 양말이나 심지어 맨발에 더 열광했다. 연주되는 음악뿐만 아니라 그의 수염이 얼마나 자랐는지, 후드 티와 청바지를 즐겨 입는 그의 캐주얼한 패션이 클래식 음악계에 얼마나 유별난지, 일거수일투족에 다양한 반향을 일으켰다.

이고르 레비트 피아노 리사이틀 포스터. 빈체로 제공

이고르 레비트 피아노 리사이틀 포스터. 빈체로 제공

그 후로 장장 53회의 온라인 콘서트가 레비트의 트위터 계정을 통해 실시간으로 중계되었다. 보통의 콘서트홀 무대였다면 공연의 홍보부터 무대의 세팅, 악기의 음향, 티켓 판매까지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겠지만 온라인 콘서트는 그로부터 훨씬 자유로웠다. 게다가 무엇보다 강력했던 장점은 프로그램의 '선곡'에 있었다. 고립된 격리의 상황은 역설적이게도 어떤 곡이든 연주할 수 있는 과감한 자유를 제공했던 것이다. 이 지면에도 소개했던 2020년 5월 30일 공연에선 에릭 사티의 '벡사시옹(Vexation)'을 선곡하며 자신의 스트리밍 공연이 시류에 영합한 가벼운 이벤트가 아님을 몸소 증명했다. 사회와 역사를 일깨우기 위한 음악가의 처절한 몸부림은 음악계를 넘어 적잖은 반향을 일으켰다.

덕분에 그의 22번째 스트리밍 콘서트는 독일 대통령 관저에서 개최되었다. 레비트는 이 기회를 연주만으로 채우지 않고 목청 높여 이렇게 주장했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무대를 잃고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공적지원이 절실합니다." 2020년 10월 독일 연방 공화국은 레비트에게 공로훈장을 수여한다. 고립과 절망의 시기에 음악을 통해 공동체 의식을 북돋워 희망을 제시했다는 이유였다.

레비트가 즐겨 입는 티셔츠엔 "음악을 사랑하고, 인종차별을 혐오한다(Love Music Hate Racism)"는 문구가 새겨져있다. 그의 SNS에선 음악뿐만 아니라 기후위기, 전쟁, 난민 등 우리 시대의 중차대한 이슈를 통렬히 각성시킨다. 자신의 예술을 역사적 흐름과 분리하지 않으며 무심한 익명성에 비판과 경계를 일깨워 온 레비트의 행보는 앞으로 어디를 향하게 될까. '시민. 유럽인. 피아니스트'란 그의 존재감이 어떻게 진화할지 한 사람의 청중으로 유심히 응원하고 싶다.

조은아 피아니스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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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아피아니스트ㆍ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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