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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과나후아토, 청년들이 지켜낸 낭만과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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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내내 함께 걷던 햇빛이 스러지고 후끈해진 발바닥이 슬슬 신호를 보낼 무렵, 어둑한 광장이 저 끄트머리부터 술렁이기 시작했다. 중세 떠돌이 음유시인처럼 딱 달라붙는 스타킹에 금실을 수놓은 봉긋한 반바지, 소매는 잔뜩 부풀리고 기다란 망토까지 걸친 한 무리의 청년들이 깃발을 앞세우고 등장한다.
노랫소리를 따라 술렁술렁 사람들이 모여들고 제법 분위기가 무르익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우르르 사람들을 이끌고 어디론가 걸어간다. 한 번이라도 방문해 본 사람이라면 멕시코에서 아니 지구상에서 가장 로맨틱한 도시라 입을 모으는 멕시코 중부의 소도시 과나후아토(Guanajuato). 번쩍번쩍 은이 쏟아지는 광맥을 깔고 앉아 18세기 최대의 은 생산지라는 명성을 누리던 화려한 시절이 고풍스러운 건물에 고스란히 남았다.
그 알록달록한 집들 사이로 밤거리 구석구석을 누비며, 때로는 골목에 얽힌 슬프고도 아름다운 전설을 들려주고, 때로는 짓궂은 장난을 치며 유쾌한 농담을 들려주고, 때로는 연인의 창가에서 부르던 세레나데를 들려주었다. 이렇게 거리의 악사와 함께하는 산책을 '카예호네아다(Callejoneada)'라고 하는데, 종일 걸어 풀린 무릎에도 불끈 기운을 불어넣어 홀린 듯 골목을 떠돌게 만든 이들의 정체는 바로 과나후아토 대학의 학생들이었다.
300년 가까운 역사를 가지고 특히 음악과 연극 분야에서 멕시코 최고로 꼽히는 명문대학이지만, 대학과 마을 사이에 경계는 없다. 하얀 석조 건물 아래 기다란 계단만 내려오면 골목골목 산책로가 곧 대학의 캠퍼스이고 그 거리의 식당들이 죄다 구내식당이고 마을 광장의 술집이 학생들의 놀이터다.
세계 4대 예술축제로 성장한 '세르반티노 국제 축제'를 만들어 낸 것도 이런 학생들이었다. 1953년 '돈키호테'를 쓴 세르반테스의 막간극을 공부하던 학생들이 직접 연극공연을 선보이는데, 그 무대는 교실도 아닌 극장도 아닌 거리의 광장이었다. 정원을 산책하던 어르신과 장보러 나가던 아주머니가 오며 가며 응원을 보내는 소박하고 따뜻한 무대. 지역대학과 지역민이 함께 즐기려는 작은 시도가 70년이 지난 지금은 전 세계인이 사랑하는 축제가 되었다.
시월 내내 과나후아토를 들썩이게 한 세르반티노 국제 축제도 내일모레면 막을 내린다. 올해는 우리가 축제의 주빈국이라 평소보다 반가운 보도도 많았다. 유난히도 축제가 많은 시월, 우리나라에서도 지난 몇 년 줄줄이 취소됐던 행사들이 한이라도 풀 듯 쏟아졌다. 오랜만에 모인 사람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했지만, 마음 한쪽은 아쉬움이었다. 이름을 대기조차 어려울 만큼 수많은 지역축제 중에 주민이 직접 만들고 즐기는 축제는 얼마나 됐을까? 그곳에 사는 사람이 관객이 아니라 무대의 주인인 축제는 그저 욕심일 뿐일까?
로맨틱 영화의 세트 같은 아기자기한 골목도 좋고, 18세기 모습 그대로인 멋스러운 건축물도 좋았지만, 과나후아토의 가장 큰 매력은 관광객이 빠져나가면 무덤처럼 잠들어버리는 박제된 관광도시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오래된 골목을 끊임없이 오가는 젊은이들의 활력과 그들을 너그러운 웃음으로 맞이하는 어르신들의 여유로움. 이 모든 것들이 스스로를 위하는 낭만의 에너지가 되어 우리 모두를 춤추게 만들었다. 스스로 즐기는 자는 이길 수 없다는 동양의 현자 말씀은 머나먼 멕시코에서도 통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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