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보

단독

돌에 맞고 태풍에 새끼 잃고… 기구한 엄마개 진순이

입력
2022.10.27 11:00
구독

3년 전 개장수에 끌려가던 떠돌이개 구조
3년간 매일 밥 챙겨주며 지극정성 돌봐
태풍 힌남노로 새끼 잃어 결국 긴급 구조
진순이와 새끼 네 마리, 입양처 찾는 중


진순이는 충남 천안시 재개발지역 공사장 컨테이너 밑에 새끼 일곱 마리를 낳았지만 태풍 힌남노의 영향으로 세 마리를 잃었다. 고아라씨 제공

진순이는 충남 천안시 재개발지역 공사장 컨테이너 밑에 새끼 일곱 마리를 낳았지만 태풍 힌남노의 영향으로 세 마리를 잃었다. 고아라씨 제공


"(진순이 가족을) 어떻게든 살려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진순이가 구조된 게 지금도 꿈만 같아요."

충남 천안시 서북구 한 재개발지역 공사장 인근에서 3년 동안 떠돌이개 '진순이'(4세 추정)를 돌봐온 고아라(41)씨의 얘기다. 고씨는 지난달 말 동물권행동 카라의 도움으로 진순이와 새끼 네 마리를 구조했다.

6일 오후 2시 고씨는 공사장 내 파란색 컨테이너 밑에 숨어 있던 강아지 세 마리를 컨테이너 옆에 설치된 포획틀 안에 넣었다. 엄마개 진순이를 포획틀로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컨테이너 밑 다른 한 마리 새끼를 품은 진순이는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지게차가 컨테이너를 들어 올리자 진순이는 잽싸게 도망갔고 고씨와 카라 활동가들은 그사이 남은 새끼 한 마리를 포획틀 안으로 넣었다.

돌아온 진순이는 컨테이너 밑으로 다시 숨었고, 사람이 들어갈 수 없는 공간이라 지게차가 컨테이너를 다시 들어 올려야 했다. 진순이는 도망가는 대신 자리에서 망설였다. 5분쯤 지나자 진순이는 새끼 네 마리가 있는 포획틀로 들어와 아이들을 품었다. 박상욱 카라 활동가는 "새끼들이 엄청나게 울어댔다"며 "진순이의 모성애가 강해 포획틀로 들어가면 잡힌다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안으로 들어온 것 같다"고 전했다.

3년 전 잡혀가던 진순이 구조로 시작된 인연

공사장 컨테이너 밑에 새끼를 낳고 돌봐온 진순이. 고아라씨 제공

공사장 컨테이너 밑에 새끼를 낳고 돌봐온 진순이. 고아라씨 제공

이날 구조는 세 시간여 만에 끝났지만 고씨와 진순이와의 인연은 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9년 10월 그는 천안시 서북구 성성동을 지나던 새벽, 차 안에서 개 비명소리를 듣고 따라가던 곳에서 뒷다리와 앞다리가 묶인 개를 발견했다. 그는 112에 신고했고, 개를 데려가려던 이들은 자리를 떠났다. 묶인 줄을 풀어주자 개는 다리를 절뚝거리면서도 빠르게 도망쳤다. 나중에서야 개를 데려가려 했던 이들이 동네 개장수였음을 알게 됐다.

고씨는 다음 날 아침 개를 발견했던 장소를 다시 찾았다. 알고 보니 재개발지역 공사장이었고, 개는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 그는 집에 돌아와서도 개가 계속 눈에 밟혔고, '진순이'라 부르며 하루에 두 번씩 밥을 주기 시작했다. 상처가 있으면 병원에서 약을 타다 먹였고, 추운 날에는 핫팩을 넣어주는 등 지극정성으로 돌봤다.

공사장을 전전하며 살던 진순이. 고아라씨가 3년간 돌보다 결국 구조에 성공했다. 엉덩이는 누구에게 맞았는지 상처가 나 있었다. 고아라씨 제공

공사장을 전전하며 살던 진순이. 고아라씨가 3년간 돌보다 결국 구조에 성공했다. 엉덩이는 누구에게 맞았는지 상처가 나 있었다. 고아라씨 제공

밥을 챙겨준 지 1년이 지났지만 진순이는 고씨 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는 구조나 입양할 형편이 되지 않았지만 밥은 꼬박꼬박 챙겼다. 하지만 진순이는 공사장 인부들에게는 눈엣가시였고, 개장수에게는 돈벌이 수단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진순이에게 돌을 던지고 욕하고 심지어 기름을 부은 적도 있었다"며 "그럼에도 갈 곳 없는 진순이는 그곳을 떠나지 못했다"고 했다.

태풍으로 새끼 잃어... 동물단체가 긴급 구조

진순이를 돌보던 고아라씨와 카라 활동가들이 컨테이너 밑에서 진순이가 낳은 새끼를 구조하고 있다. 카라 제공

진순이를 돌보던 고아라씨와 카라 활동가들이 컨테이너 밑에서 진순이가 낳은 새끼를 구조하고 있다. 카라 제공

고씨가 진순이 구조를 시도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동물단체와 방송사에도 연락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떠돌이개는 너무 많아 구조하기 어렵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는 사이 1년이 지났고 지난해 10월 그는 가족 직장 문제로 경기 용인시로 이사를 가야 했다.

고씨는 이사를 간 이후에도 왕복 3~4시간을 들여 매일 진순이의 밥을 챙겼다. 그는 고1과 중3 자녀가 등교한 후 천안을 왕복하는 게 일상이 됐다. 그는 "가족들과 불화가 없었던 건 아니다"라며 "다만 아이들이 진순이를 끝까지 책임지라고 응원해 준 게 큰 힘이 됐다"고 했다.

진순이는 포획틀 내 새끼를 향해 안으로 들어왔다. 카라 제공

진순이는 포획틀 내 새끼를 향해 안으로 들어왔다. 카라 제공

고씨는 8월 초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개설하고 본격적으로 구조 요청과 입양 홍보에 나섰다. 그러던 중 카라 활동가로부터 진순이를 보호소에 입소시킬 수는 없지만 구조는 해 줄 수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임시보호처를 알아보던 중 진순이는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고, 지난달 초 컨테이너 밑에 일곱 마리의 새끼를 낳았다. 하지만 태풍 힌남노의 영향으로 새끼 세 마리가 죽었다. 사정을 들은 카라가 더는 구조를 지체하긴 어렵다 판단하고 이달 초 구조에 나선 것이다.

2년 반 동안 진순이와 고씨를 지켜봐 온 장지은(54)씨는 "진순이는 수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다. 정말 생명력이 강하다"며 "경계심이 많아 고씨가 주는 밥만 먹었다. 고씨의 지극정성으로 진순이가 산 것 같다"고 했다.

가족 기다리는 진순이 가족

카라 입양센터인 아름품에서 지내고 있는 진순이 가족. 고아라씨 제공

카라 입양센터인 아름품에서 지내고 있는 진순이 가족. 고아라씨 제공


카라 활동가가 진순이 새끼를 안아보고 있다. 카라 제공

카라 활동가가 진순이 새끼를 안아보고 있다. 카라 제공

구조된 진순이 가족은 서울 마포구 카라 입양센터인 아름품에서 지내며 가족을 기다리고 있다. 네 마리 강아지는 몽지, 빵지, 콩지, 단지라는 이름을 얻었다. 박상욱 카라 활동가는 "진순이는 사람을 두려워했지만 3주 정도 지나자 활동가들에게 꼬리를 흔들 정도로 사람을 좋아하게 됐다"며 "사람에게 길러지다 버림받았을 것 같다"고 추정했다.

고씨는 "사람 곁에 오지 않던 진순이가 배를 보이고 사람을 좋아하는 모습에 깜짝 놀랐다"며 "구조할 때까지 기다려준 공사장 사무소 관계자, 구조에 나선 활동가에게 감사하다"고 전했다. 이어 "진순이 얼굴이 밝아지는 게 보여 눈물이 났다"며 "진순이가 가족을 만나지 못할 경우에도 끝까지 책임지겠다"고 덧붙였다.

고은경 애니로그랩장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