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9·19 합의 파기 넘어 NLL 무력화 시도…49년 전부터 이어온 도발

입력
2022.10.24 19:00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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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서해 최남단 무도ㆍ장재도 방어대 시찰에 나선 모습. 연합뉴스

2017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서해 최남단 무도ㆍ장재도 방어대 시찰에 나선 모습. 연합뉴스

24일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40여 분간 침범한 북한이 오히려 우리 함정이 '해상 군사분계선'을 침범했다고 걸고넘어졌다. 방사포를 동원한 경고 사격도 했다. 북한이 쏜 방사포 10발은 9·19 군사합의에서 사격 훈련을 금지한 NLL 북방 해상완충구역 내에 떨어졌다.

북한이 언급한 해상 군사분계선은 1999년 제1연평해전 직후 일방적으로 설정한 경계로 보인다. NLL보다 훨씬 남쪽으로 그어져 서해 5개 도서 남단의 해상까지 포함한다. 북한의 이날 도발은 9·19 군사합의 파기를 넘어 1953년 설정한 NLL을 무력화하기 위한 시도로 풀이된다.

이날 NLL 남쪽으로 최대 3.3㎞까지 남하한 북한 상선은 우리 군의 20차례의 경고방송과 20회의 경고 사격을 무시한 채 40여 분간 머물렀다. 군 관계자는 “우리의 경고 통신에 북측 상선은 자기 측 해역에 침범하지 말라는 부당통신(상호 교신이 아닌 일방적으로 하는 통신)을 했다”고 말했다.

1953년 8월 유엔군사령관이 유엔군의 해상초계 활동 범위를 한정하기 위해 설정한 NLL은 육지의 군사분계선(MDL)과 달리 정전협정이나 남북 합의에 따른 경계선은 아니다. 하지만 설정 당시 북한이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아 실질적 해양경계선 역할을 해 왔다.

정전 후 20여 년간 NLL을 인정해 왔던 북한은 해군력이 증강되자 이를 부정하기 시작했다. 1973년 10월부터 1년여간 경비정 60여 척을 동원해 40여 차례에 걸쳐 NLL을 침범, 분쟁수역화를 시도한 게 대표적이다.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 부속합의에서 “해상 불가침 구역은 해상 불가침 경계선이 확정될 때까지 쌍방이 관할해온 구역으로 한다”는 데 합의하며 북한이 NLL을 수용한 것으로 인식됐지만 이 역시 오래가지 않았다. 북한은 1999년 6월 15일 제1연평해전을 일으키며 본격적으로 NLL 무력화에 나섰다. 석 달 후에는 NLL 남쪽에 일방적으로 해상 군사분계선을 선포했고 2007년에는 NLL 바로 아래쪽에 걸쳐진 ‘서해 경비계선’을 설정했다. 이를 근거로 한 북한의 도발도 계속됐다. 2002년 6월 제2연평해전, 2009년 11월 대청해전, 2010년 연평도 포격사건 등 대형 도발뿐 아니라 국지 도발도 수차례 있었다.

‘한반도의 화약고’라 불릴 정도로 서해상에서 무력 충돌이 잦아지자 진보 진영 대통령을 중심으로 이 일대를 평화수역으로 바꾸려는 시도가 있었다. 2007년 정상회담에서 당시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공동어로수역 지정과 평화수역 조성에 합의했지만 이후 장성급회담에서 이를 구체화할 접점을 찾지 못했다. 2018년 9월 정상회담에서도 마찬가지다. 당시 문재인 대통령은 9·19 군사합의에 따른 해상완충구역(NLL 기준 남측 85㎞·북측 50㎞) 설정과 관련해 “북한으로 하여금 NLL을 인정하게 하겠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북한은 2020년 9월 서해 공무원 피격 사건과 관련, NLL 이남에서 수색에 나선 군 당국에 “우리 측 수역을 침범했다”며 공개 반발했으며, 남북관계가 경색된 최근까지도 NLL을 실질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정승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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