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우리 역사를 바꾸고 문화를 새롭게 인식하도록 한 발견들을 유적여행과 시간여행을 통해 다시 한번 음미한다. 고고학 유적과 유물에 담긴 흥분과 아쉬움 그리고 새로운 깨달음을 함께 즐겨보자.
<25> 오이도 신석기시대 패총 유적
도시의 삶이 고달프고 짜증스러울 때 기분전환을 위해 갈 수 있는 곳이 수도권 지역에 많지만, 안산시의 시화호 북쪽 귀서리에 있는 오이도는 최고 명소 중 하나다. 그런데 그 경치를 현대인만 즐겼던 것은 아니다. 5,000년 전의 신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자주 들락거리던 명소였을 것이다. 오이도(烏耳島), 까마귀 귀처럼 생긴 섬. 시화호 북쪽 모서리에 서해에 면한 해발 49미터의 작은 산을 그렇게 부른다. 어쩌면 세종 대(代)에 부른 이름이 ‘오질이도(吾叱耳島)’였으니 ‘오지다’라는 우리말에서, 알찬 섬 또는 풍요로운 섬이라는 뜻이 아닐까 싶다.
‘도(島)’라는 접미사가 붙어 있지만 이젠 섬이 아니다. 동쪽으로 시흥 시내까지 평평한 공간에 공장 건물이 연이어 있다. 하지만 1960년대만 해도 일제강점기 때 조성된 넓은 염전이 차지하였고, 70년대 염전 폐쇄 이후 매립부지에 수많은 공장이 들어섰다. 과거에는 썰물이 되면 4㎞에 달하는 갯벌 끝에 아련히 보이던 섬이 바로 오이도였을 것이다. 서해안에서 가장 규모가 큰 신석기시대 패총유적으로 14만 평 섬 전체가 국가사적(441호)으로 지정돼 보존되고 있다.
시화호의 관문, 오이도
예전에는 오이도에 가려면 수인선 협궤열차를 타고 군자역에서 내려 뜨거운 햇볕이 반사되는 염전의 뚝을 한참 걸어야만 했다. 그러나 이제는 유명한 어시장이 자리한 소래에서, 또는 안산에서 시화호 해변으로 뚫린 해안도로를 따라 오이도 앞에서 만나면 시화방조제로 연결된다. 만장같이 넓은 호수, 12㎞나 되는 방조제 그리고 오후가 되면 하늘에서 태양과 구름이 함께 만드는 빛의 향연이 시시각각 벌어진다. 주말엔 엄청난 수의 자전거족들이 호수 바람을 즐기고, 방조제 아래 물가에는 낚시꾼들이 구름처럼 몰린다. 시화호의 관문 역할을 하는 오이도박물관 앞에서 황혼 무렵 바라보는 낙조 풍경은 그 어떤 레이저 쇼도 따라올 수 없다. 지금은 군부대가 있어 갈 수 없지만 섬 꼭대기, 봉수대(烽燧臺)가 있던 자리에서 보는 서해 풍광은 가슴을 탁 트이게 한다. 밤이 되면 정왕동 빨간 등대가 위치한 거리는 서울의 웬만한 명소보다 화려한 불빛 아래 젊은이들의 소리로 가득하다.
과거에도 오이도는 서해 시화만의 뱃길에서 가장 인기 있는 쉼터였을 것이다. 육지로 들어오는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섬 곳곳에 남아 있는 선사시대부터 만들어진 많은 조개무지도 그러한 정황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오이도에는 왜 이리 조개무지가 많을까?
오이도에는 해안의 낮은 곳뿐 아니라 산의 경사진 비탈면에도 패총이 남아 있는 곳이 많다. 패각을 이용한 닭사료 공장이 있었을 정도이니 조개껍질 노천광산의 모습이었음 직하다. 그만큼 선사시대 사람들이 오이도에 많이 출현했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보다 내륙에 자리한 같은 신석기시대 마을유적인 시흥 능곡유적이나 이곳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안산의 신길유적에는 패총의 흔적이 없다. 정말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주변에서 나는 음식들만 먹고살았을까? 그리고 이웃한 마을끼리 왕래가 없었던 것일까?
오이도는 가장 풍부한 먹거리 자원 환경인 갯벌로 둘러싸인 곳이다. 육지와 바다가 만나는 갯벌은 평지 위에 조수가 드나들며 만든 두터운 펄에 풍부한 생물이 있어 사시사철 먹거리를 장만할 수 있는 생태계이다. 패총에 많이 보이는 굴 역시 오이도 사람들의 중요 먹거리였을 것이다. 또한 유적에 남아 있지는 않아도 오늘날 갯벌에서 보이는 생물이 당시에도 존재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는 많이 남아 있는 조개껍질이 인접한 내륙 마을에서는 보이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어쩌면 바다 먹거리를 운반할 때 가능한 한 많이 가져가기 위해 이 섬에서 껍질을 까고 알맹이만 토기나 바구니에 담아 간 것은 아닐까? 그래서 오이도 곳곳에 두꺼운 패각층이 남게 된 것 아닐까? 바다에서 멀지 않은 내륙이니 굴 맛을 모를 리 없을 텐데도 유적에서 조개가 보이지 않는 것은 이 같은 상상을 하게 한다.
오이도, 바다와 육지의 교차로
중국으로 가던 왕(王)이 태풍을 만나 피신했다는 전설은 오이도 바로 옆 옥귀도에도 전한다. 오이도 정상에 굿당이 오랫동안 있었다는 점도 이곳이 바닷길을 나서는 곳이었음을 말해준다. 경기만 일대 해안을 오가는 사람들은 오늘날 시화호 안쪽으로 들어오는 북쪽 길목에서 오이도를 만나게 된다. 주변 넓은 갯벌에서 해산물을 채집하던 사람이나, 밀물 때 이 앞을 항해하던 사람들의 중간 쉼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유적공원구역에서 발굴된 신라시대 마을 위쪽에 우물과 봉수대가 존재한 것으로 보아 작은 섬이지만 상당히 큰 마을이 지속적으로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인천에서 당진 사이 서해안 지역은 연안 교통이 활발하여 하나의 생활권으로 연결된다. 신석기시대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오이도 유적의 빗살무늬토기들은 대체로 신석기시대 중기 이후, 즉 기원전 3,500년 전경 이후의 것이 많은데 지역적인 변화가 있기는 하지만 유사한 문양들이 황해도의 유적이나 부안, 당진 등지의 패총에서도 보인다. 그래서 이 지역을 묶어서 ‘중서부빗살무늬문화권’이라고 부른다. 신석기시대에도 오이도 유적은 경기만을 중심으로 황해도와 당진반도 사이를 남북으로 이동하는 교차로였던 모양이다. 오이도 신석기패총 유적에서 발굴된 부서진 토기 조각들은 고대부터 경기만 일대 사람들의 삶을 상징하는 유물이다.
염원이 작은 기적을 일으키다
오이도 유적은 1960년대에 고 윤무병 교수가 빗살무늬토기를 최초로 발견하면서 알려졌다. 그 후 임효재 서울대 교수를 비롯한 고고학자들이 여러 차례 조사하면서 섬 곳곳 조개무지 속에서 신석기시대 토기인 빗살무늬토기 편들을 발견하였다. 서해안의 섬들에서 신석기시대 패총이 발견되기는 했지만 이곳만큼 섬 전체에 널리 분포하는 곳은 없었기 때문에 고고학적으로 서해안에서 가장 대표적인 유적으로 평가되었다. 그런데 시화공단이 생기면서 유적이 지속적으로 훼손된 데 이어 오이도 동편에 철강단지가 건설되면서 대규모 훼손 위험에 처하였다.
"아무리 말해도 안 들어요! 교수님, 막을 방안이 없을까요?" 그동안 철강단지 개발자들을 상대로 유적보존을 위해 싸우던 ‘오이도선사유적보존을 위한 시민대책위원회’의 지도자 이화섭·김상신씨 등과 시흥문화를 누구보다도 사랑했던 시흥문화원의 고 이한기씨가 2000년대 초 한양대 안산캠퍼스의 내 연구실로 찾아왔다. 그들의 열정은 고고학자로서 내 자존심을 건드렸다. "그래, 어렵겠지만 사적지정을 시도해 봅시다!" 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신속히 국가사적으로 지정돼 보호받게 하자는 것이다. 국가사적이 되면 유적은 물론 그 주변 지역도 완충지대로 지정되어 건축 등에 의한 훼손이 제한되기 때문이다. 개발자와의 전면전이었다.
결국 오이도 유적은 사적으로 지정됐고, 보호구역 협상과정에서 박물관 건립기금지원까지 약속받았다. 오늘날 오이도 선사유적공원과 박물관은 '문화유산은 지역개발을 저해하는 골칫거리'라는 생각이 만연하던 때 지역 시민과 고고학자들이 함께 나서 보존을 외치고 이뤄낸 결실이다. 뜻 있는 시민의 염원이 이뤄낸 작은 기적이라 할 만하다.
오이도의 야누스적 문화풍경
오이도의 정왕동은 주말엔 서울 강남 번화가보다 사람들로 붐비고 밤이 되면 더욱 휘황찬란하다. 도시 젊은이들이 몰려들어 열정과 낭만이 분출되는 해방구가 되었다. 그런데 서해와 면한 정왕동 시가지와는 달리 공단 방향, 즉 동쪽 사면에 있는 오이도선사유적공원은 그야말로 한적한 산사의 분위기가 감돈다. 깨끗하게 복원된 초가집과 움집들 사이로 잘 다듬어진 오솔길에 올라 산등성을 넘으면 정왕동의 빨간 등대가 눈에 들어온다. 오이도의 동과 서, 어쩌면 우리 문화 향유의 양극화 현상을 보는 듯하다. 언젠가는 동쪽 사면의 유적공원에도 억새풀 사이로 파아란 클로버가 올라온 잔디밭 곳곳에 청춘 남녀와 가족들이 모여 앉아 고대 사람들을 상상하며 한가한 시간을 보내는 날이 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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