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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 계절에 열리는 학회 풍경

입력
2022.10.23 22:00
수정
2022.12.26 22:32
27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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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다. 하지만, 이 말은 날씨가 좋은 계절에는 놀기가 좋아서 책을 너무 안 읽는 나머지, 책을 좀 사 주십사 하는 출판업계의 소망을 담은 표어로 알려졌다. 필자에게 가을은 학회의 계절이다. 이렇게도 좋은 계절에 왜 컴컴한 곳에 불편한 옷을 입고 모여 앉아 공부해야 하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는 말에 대한 순진한 집단적 실천의 형식으로 보인다.

컴컴한 홀에서 공부가 깊은 분들의 잘 정리된 강의를 들으면 감탄과 위안을 얻는다. 청중은 듣고 봐주는 일에 시간을 내주는 사람이므로, 연자는 청중을 더 많이, 더 쉽게 이해시키도록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한다. 이것이 앉아서 듣는 사람들이 어렵게 할애해준 시간을 독점하고 앞에 서 있는 사람의 예의고 의무다. 그래서 부실하거나 너무 과한 슬라이드, 정제되지 않은 말, 미숙하거나 거만한 태도 모두에서 무례함이 느껴진다. 좋은 생각이 담긴 꽃씨를 뿌리는 게 아니라 오물을 뿌리는 것 같다. 100을 다 채워 질식시키는 강의보다는 80을 채우고 청중 몫으로 20 정도는 남겨둬야 좋은 강의란 소리도 있다. 날아간 꽃씨가 마음속에 싹을 틔울 여유를 주는 강의, 심란함보다는 호기심이 퍼져가는 강의!

학회는 또 어떤 의미에서는 꽤 오랜 시간 동안 나와 대화하는 시간이다. 언제부턴가 남의 말은 잘 안 들리고, 듣는 척하는 연기력도 떨어지고 있다. 발표를 들으면 어디선가 떠들고 있는 내 내면의 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 쉬는 시간은 친교의 시간인데, 오히려 빈 강의 홀에 멍하게 앉아 공상하는 시간도 참 좋다. 바쁜 분들은 강연장에서 노트북이나 패드를 꺼내는데, 디지털 디바이스의 패널이 쨍하고 두께가 얇을수록 세련된 사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보면 강의 필기가 아닌 다음에야, '난 당신 강의보다 내 일이, 더 중요해'라는 마음을 만천하에 들키고 있는 셈이다. 인간은 수동적인 방식으로도 은근하게 공격성을 충족할 수 있는 동물이다.

논쟁적인 주제에 소수의견으로 발을 담그면 재판장에 선 피고가 된 것 같다. 스타 검사들은 입을 모아 독한 말로 죄를 추궁하고, 주위를 둘러보아도 내 변호사는 점잖은 표정으로 말이 없다. 배심원들은 이미 모두 매수당한 것 같다. 확신을 가지고 거침없이 자기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부럽고 또 무섭다. 계곡에 가서 돌을 다 보지도 않았으면서, 자기가 주워 온 돌만 예쁘다고 한다. 19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탐험가이자 작가인 리처드 버턴은 이런 말을 했다. "진실은 수만 조각으로 깨진 거울인데, 사람들은 내 작은 조각이 전체인 줄 아네."

경품 추첨은 학회의 맨 마지막 날, 마지막 순서로 진행된다. 그 이유는 노골적이고도 분명하다. 끝까지 자리를 빛내 달라는 뜻. 필자는 수없이 많은 학회에 순진하게도 끝까지 앉아 약간의 흥분된 가슴을 부여잡고 경품 추첨을 지켜봐 왔지만, 모두 허망한 일이었다. 엊그제는 넣기만 하면 당첨된다는 분의 지인으로부터 응모권을 넣는 비밀 요령을 건네 들었다. 종이를 반듯하게 접어서 넣는 것이 아니라, 구의 모양이 되도록 구겨진 형태로 마지막쯤에 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추첨하는 분의 손에 잘 잡힌다고 한다. 다음부터는 내 작은 조각의 행운을 더 치밀하고 입체적인 형태로 시험해봐야겠다.



오흥권 분당서울대병원 대장암센터 교수·'의과대학 인문학 수업' '타임 아웃'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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