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떠난 여행, 스치는 인연의 긴 여운

입력
2022.10.24 00:00
27면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여름의 열기가 식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니 방랑벽이 도진다. 모난 성격 때문인지 혼자 떠나는 여행, 특히 혼자 오래 걷는 여행을 좋아한다. 너그러운 아내의 허락을 받고 오랫동안 마음에 두어 왔던 곳으로 일주일 남짓 트레킹을 떠났다. 옷 몇 벌, 책 한 권, 작은 노트와 아끼는 만년필이 든 배낭을 메고 나서는 발걸음이 가볍다. 일찍 일어나 든든하게 아침을 먹고 물병을 채워 길을 나서 오후에 다음 숙소에 닿을 때까지 걷는다. 산장에 도착하면 짧은 샤워를 하고, 노트에 일과를 적고, 집에 엽서를 한 장 쓰고, 저녁을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든다. 다음날 일어나 같은 일정을 반복한다. 이 간소한 일상을 반복하며 삶에서 정말 필요하고 소중한 것은 무엇인지 생각한다.

혼자 떠난 여행이지만 외로운 길은 아니다. 혼자 저녁 식탁에 앉아있는 나를 동석하자고 초대해 준 호주인 노부부는 쉽지 않은 산길을 70대 후반에 걷는 노익장을 과시한다. 젊은 시절부터 산을 좋아해 세계 곳곳의 산들을 같이 걸어 왔단다. 아홉 명의 손주가 있지만 일이 좋아 은퇴하지 않고 있다는 그들에게서 잘 살아온 삶의 향기가 느껴진다. 둘째 날 산장에 도착해 같이 맥주잔을 기울이게 된 내 또래의 두 네덜란드 남자는 십대부터 줄곧 같이 산행을 해왔단다. 오랜 시간 익어 온 편안한 우정이 부럽다. 시리게 맑은 날, 산중 찬 공기를 맞으며 별을 보러 나왔더니 브라질 여성이 삼각대에 카메라를 하늘로 세워 사진을 찍고 있다. 긴 노출시간 같이 숨을 죽이며 찍은 사진에 황홀한 은하수가 잡혀 있다. 우리 맨눈에 보이지 않는 그 은하수가 좋아 기회가 되면 카메라를 메고 산을 오른다고 한다. 마지막 날 같이 걷게 된 베네딕트 컴버배치를 닮은 미국 청년은 20대를 바친 의류사업을 코로나19 때문에 접고 인생의 다음 장을 준비하며 몇 달간 이곳저곳을 걷고 있단다. 같이 맥주 한잔을 하고 헤어지면서 그가 긴 여행길 끝에 삶의 다음 이정표를 찾기를 기원했다.

아마도 이들은 다시는 못 만날 스치는 인연들일 것이다. 우리 삶에서 오랜 시간을 같이하는 가족, 친구, 동료의 중요함이야 두말할 필요 없지만, 나는 이런 짧은 인연들도 소중히 여긴다. 젊은 시절 여행길에서 만난 낯선 사람들이 베푼 짧은 우정과 친절에서 나는 세상이 아름답고 살 만한 곳임을 배웠다. 이번 여정에 만난 인연들도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산 위에서 뜨는 해가 멀리 산봉우리를 지구 자전의 속도로 빨갛게 물들이는 것을 영어로 '알펜 글로'라고 하는데, 작가 킴 스탠리 로빈슨은 그걸 두고 시간의 속도라고 했다. 삶의 군더더기를 털어내고 가벼운 배낭을 메고 나선 길에서 삶의 속도는 시간의 속도로 늦춰지고, 그래서 그 시간을 같이한 짧은 인연이 남기는 여운은 오래가는 모양이다.

여행을 마치고 따뜻한 가족의 품으로 돌아와 다시 일상을 시작하면서 낯선 사람들에게 더 친절하자고 다짐한다. 산책길에 눈이 마주치는 사람에게 웃으며 눈인사를 건네고, 건물에 들어갈 때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지 다시 돌아본다. 바쁜 일상에 젖다 보면 아마 여행의 기억은 희미해지고 이런 다짐도 느슨해질 것이다. 그러면 나는 다시 길을 떠날 준비를 할 것이다. 항해사 베르나르 무아트시에의 말처럼 나는 길 위에서 행복하니까. 그리고 어쩌면 내 영혼을 구제하기 위해서.


임채윤 미국 위스콘신대학 사회학과 교수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