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호크마 샬롬'은 히브리어로 '지혜여 안녕'이란 뜻입니다. 구약의 지혜문헌으로 불리는 잠언과 전도서, 욥기를 중심으로 성경에 담긴 삶의 보편적 가르침을 쉽고 재미있게 소개합니다.
생사기로 아들에 매달렸던 다윗 왕
세상 떠나자마자 재빨리 냉정 회복
과거를 인간미 없이 잊는 것도 지혜
"우리는 다 죽습니다. 땅에 쏟으면, 다시 담을 수 없는 물과 같습니다."(사무엘하 14:14). 살다 보면 우리는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일을 경험한다. 자신의 잘못 때문에, 혹은 남 때문에 혹은 그 중간쯤이기도 하다. 그 가장 확실한 예로 위 구절은 죽음을 말한다. 한번 건너면 돌아올 길 없다.
이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것은 웃프게도 죽는다는 것이다. 저항을 할 수도 공격할 수도 없는 가장 확실한 것이기에 죽음은 비통하고 슬프다. 고대 이스라엘의 최고 영웅인 다윗 왕에게도 다시 담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태어난 아들이 몹시 앓았다. 자기 자식을 잃는 것처럼 못 견딜 일이 있을까? 그래서 다윗은 이랬다. "다윗이 그 어린 아이를 살리려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리면서 금식하였다. 그는 왕궁으로 돌아와서도 밤을 새웠으며, 맨땅에 누워서 잠을 잤다. 다윗 왕궁에 있는 늙은 신하들이 그에게로 가까이 가서, 그를 땅바닥에서 일으켜 세우려고 하였으나, 그는 일어나려고 하지도 않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으려고도 하지 않았다."(사무엘하 12:16-17). 최고 권세를 누리는 왕이든 누구든 다르지 않다. 자식의 생사 앞에서는 딱 이 모양 이대로일 것이다.
아비의 절박함을 잘 알기에 신하들은 아기가 죽고 나서도 감히 왕에게 이르지 못하고 이렇게 서로 말했다. "어린 왕자가 살아 계실 때에도 우리가 드리는 말씀을 듣지 않으셨는데, 왕자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우리가 어떻게 전하여 드릴 수 있겠소? 그런 소식은 임금님의 몸에 해로울지도 모르오."(사무엘하 12:18). 그 상심을 감당치 못할 것임을 신하들이 모를 리 없었다.
뜻밖에도 다윗은 뭔가 달랐다. 특출난 왕으로 성공한 것에는 다른 것이 있는가 보다. 아들의 죽음을 알게 된 다윗은 언제 그랬냐는 듯 행동한다. "다윗은 땅바닥에서 일어나서, 목욕을 하고, 몸에 기름을 바르고, 옷을 갈아입은 뒤에, 성전으로 들어가서 주님께 경배하였다. 그는 왕궁으로 돌아오자, 음식을 차려오게 하여서 먹었다."(사무엘하 12:20).
의아할 정도로 매정한 반전이다. 어리둥절한 신하들이 결국 다윗에게 묻는다. 그리고 다윗은 이렇게 대답했다. "아이가 살아 있을 때에 내가 금식하면서 운 것은, 혹시 주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겨 주셔서, 그 아이를 살려 주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오. 그러나 이제는 그 아이가 죽었는데, 무엇 때문에 내가 계속 금식하겠소? 내가 그를 다시 돌아오게 할 수가 있겠소? 나는 그에게로 갈 수 있지만, 그는 나에게로 올 수가 없소."(사무엘하 12:22-23).
엎질러진 물처럼 아기의 죽음은 되돌릴 수 없다. 아무리 사랑했고 아무리 아쉬워도 땅에 쏟아진 물이다. 아기는 되돌아올 수 없어도 언젠가 자기는 갈 수 있다는 것으로만 자신을 위로했다. 아무리 연연해해도 아기에게 자신에게 가족에게 아무 득도 위로도 되지 않는다. 이때 다윗은 붙들 수 없는 과거는 깨끗이 잊어버리고 미래에 집중하자는 실용주의를 택했다. "그 뒤에 다윗이 자기의 아내 밧세바를 위로하고, 동침하니, 그 여인이 아들을 낳았다. 다윗이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고 하였다."(사무엘하 12:24).
때로는 사람이 인간미 없을 정도로 과거는 떨쳐버려야 할 필요가 있다. 벌어진 일 가지고 누구 탓으로 돌리기 바쁘고 미워하며 원망해 봤자, 새 출발에 필요한 미래의 시간과 자신의 정력만 축낼 뿐이다. 전도서의 지혜도 과거의 어둠이 미래를 그늘지지 못하게 할 것을 조언한다. "죽은 이들에게는 이미 사랑도 미움도 야망도 없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일에도, 다시 끼어들 자리가 없다. 지금은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을 좋게 보아 주시니, 너는 가서 즐거이 음식을 먹고, 기쁜 마음으로 포도주를 마셔라. 너는 언제나 옷을 깨끗하게 입고, 머리에는 기름을 발라라."(전도서 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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