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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가족양성평등’이라는 형용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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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엄마! 그거 알아요? 해마는 아주 특별해. 아빠가 아기를 낳는대!” 아이는 요즘 바다생물 해마에 꽂혀 있다. 어디선가 수컷이 산란을 한다는 걸 듣고 무척 신기했던 모양이다. 동생이 자라고 있다는 엄마 배가 잔뜩 부풀어 오르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라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홍학은 서서 잠을 잔다’는 점과 더불어 해마 이야기를 자꾸 들려주고 싶어 아이는 발을 동동 구른다. 그 모습을 볼 때면 속으로 객쩍게 외쳐본다. ‘아! 우리가 차라리 해마였더라면.’
임신으로 부푼 배를 안고 뒤뚱거리며 걷는 요즘. 해마 이야기만큼이나 자주 듣는 말이 “결혼과 출산을 추천하시나요?”라는 질문이다. 지인뿐 아니라 옷깃만 스쳐도 여성 10명 중 9명은 불안에 잠식된 눈으로, 그 길을 가버린 내게 묻는다. 늘 받는 질문이지만 매번 입이 떨어지지 않아 망설인다. 거짓말이라도 하는 양 말끝이 길어진다. “저는 행복한데요. 일을 많이 사랑하신다면 각오는 해야 해요.” “저는 만족하는데요. 주변을 잘 보세요. 선배 직장맘이 행복하게 버티고 있는지.” “저는 후회 안 하는데요. 배우자, 가족 태도가 큰 변수긴 해요.”
엄마 된 기쁨을 누려놓고도 정작 ‘강력 추천’을 외치지 못한 이유는 수두룩하다. ‘출산ㆍ육아ㆍ가사로부터 자유로운 남성’을 표준으로 상정한 많은 일터에선 엄마가 1인분도 못 하는 직원이 되기 십상이니까. 늘 죄책감 속에 동료들 사이를 비집고 서있어야 하니까. 극복하려 버둥대다가는 제 아이도 돌보지 않는 나쁜 엄마가 돼 있을 테니까. 방황하는 순간 누군가는 단언할 테니까. “역시 아이는 엄마가 돌봐야지.” “저래서 여직원은 뽑으면 안 돼.”
‘육아는 아빠의 몫이기도 하다’를 외치는 캠페인은 무수했다. 값진 성과가 있었지만, 한국 사회 보편 정서가 되려면 역부족인 것도 사실이다. 사람들은 누군가 옆에서 열심히 외치는 정도로는 제 생각을 좀처럼 의심하지 않는다. 그게 설사 “여자는 여자답고, 남자는 남자다워야 해”, “역시 애는 엄마가 키워야 해”일지라도. 그래서 필요한 게 법과 돈을 움직이는 유인책이다. 또 절실한 게 최우선 목표로 '성평등 정책’을 외치는 관료, 전문가 집단의 적극 행보다.
최근 발표된 정부조직개편안의 목적은 꽤 노골적이다. 여성가족부를 폐지하고 주요 기능을 보건복지부 산하 인구가족양성평등본부로 이관한다. 투명하게 '인구'에 방점을 찍었다. 성평등 없이는 출생률 증가 논의를 시작조차 할 수 없는 현실을 제대로 봤다면 내놓을 수 없는 게으른 구상이다. '평등’ 대신 '인구'를 앞세운 명칭부터가 지독한 형용모순이다.
정부의 논리는 쉽게 “더 큰 복지부에 가면 하던 일을 더 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도 굳이 팔 걷고 나서지 않아도 모두가 존중받고, 안전하며, 배제되지 않고 있는 사회라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곳은 독일 유력 일간지의 말마따나 여당이 반(反)페미니스트들에게 여가부 폐지라는 선물을 안기는 국가다. 있는 부처도 본부로 격하하는 판에 아무도 촉구 · 감시하지 않고, 최우선 과제로 핏대 세우지 않는데도 어젠다가 후순위로 밀리지 않는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인구ㆍ가족ㆍ평등 정책 중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작동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인구! 인구! 인구!’를 외치는 정부는 알고나 있을까. 정치적 희생양이 된 여가부의 처지를 바라보는 여성들이 그 어느 때보다 노골적인 혐오에 몸서리치고 있다는 것을.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반감 속에 출생률 증대의 도구가 되길 사양하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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