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시절의 끝

입력
2022.10.17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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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2일 서울의 한 공인중개사 사무소 앞에 붙어 있는 부동산 급매물. 연합뉴스

10월 12일 서울의 한 공인중개사 사무소 앞에 붙어 있는 부동산 급매물. 연합뉴스


아파트 입구 상가 1층엔 6개 점포가 있다. 모두 공인중개사 사무실이(었)다. 그중 두 곳이 최근 문을 닫았고, 편의점이 들어오려는 듯 내부 공사가 한창이다.

인구 23만 명인 이 구(區)에선 8월 아파트 매매가 17건, 1~8월 통틀어 157건에 그쳤다. 중개업소가 600곳이 넘으니, 업소 넷 중 셋은 올해 아파트 매매를 한 번도 성사시키지 못하고 손가락만 빨았다.

‘영끌’이 최선의 전략이던, 그 뜨겁던 시장은 왜 이토록 빨리 식었나. 적지 않은 기여를 한 사람이 바로 블라디미르 푸틴이다. 무슨 소리냐 하겠지만, 인과관계까진 아니어도 상관관계 정도는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부동산 침체 원인은 코로나 유동성, 정부 정책, 시장 참여자의 조바심 탓에 단기간 가격이 너무 올랐다(거품)는 데 있다. 그러나 하락을 앞당기고 그래프 기울기를 가파르게 한 요인은 금리다. 대출금리는 왜 올랐나?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올려서다. 한은은 미국 연준을 따라가려고 그랬다. 연준은 물가 때문에 돈줄을 급히 조였다. 미국 물가는 코로나 유동성이란 최대 변인에 우크라이나 전쟁이 겹쳐 예측을 훌쩍 상회했다.

현상에 꽂히는 화살(원인)은 여러 개지만, 굵은 화살표만 이어 도식화하면 이렇다. 우크라이나 전쟁→유가 급등→미국 CPI 앙등→연준의 고속 금리인상→한은의 추격→시중금리 급등→부동산 침체. 푸틴은 적어도 한국 자산시장을 얼리는 냉매 역할 정도는 제대로 한 셈이다.

일러스트=신동준 기자

일러스트=신동준 기자


이처럼, 세상은 나비효과란 말이 부족할 정도로 얽히고설켰다. 사람ㆍ돈ㆍ물건이 국경을 넘어 자유로이 오가는 세계화가 완성 단계에 도달한 결과다. 세계화가 아니었다면 이런 얽힘은 불가능했다. 흐루쇼프의 쿠바 미사일 배치나 브레즈네프의 아프간 침공이 한국 집값에 영향을 준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난 30년, 세상을 촘촘히 얽은 세계화는 선진국 소비자에겐 축복 같았다. 세상은 비교적 평화로웠고, 자본은 정체(政體)와 이념을 따지지 않고 가장 싼값에 효율적으로 상품ㆍ서비스를 생산할 수 있는 곳으로 거침없이 뻗어 나갔다. 그 덕에 우린 중국산 TVㆍ스마트폰을 보며, 이란 석류, 러시아 킹크랩, 벨라루스 감자칩을 낮은 가격에 즐길 수 있었다. 곧 담장 저쪽으로 넘어갈 나라들이다.

양질의 재화를 저가에 대량 소비할 수 있던 아름다운 시대(1992~2022)는 종점에 도달했다. 세계화를 전파하던 미국과 유럽은 이제 의도를 파악할 수 없는 상대, 서방의 논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지도자와 거래하는 것에 치명적 리스크가 있다는 점을 알아챘다. 러시아와 중국에 더는 휘둘리지 않고, 믿을 수 있는 나라끼리 가치사슬을 공유하는 쪽으로 경제구조를 급선회했다. 자본과 상품은 더 높은 벽을 넘어야 하고, 당연히 생산ㆍ소비 비용은 오른다.

제일 싼 원자재, 가장 저렴한 노동력을 쓸 수 없게 된 세상에서 우린 생산과 소비에 지금보다 높은 값을 치러야 한다. 안보 리스크 탓에 후생에 투자할 여력은 줄 것이고, 지금보다 더 자주 에너지 쇼크에 노출될 것이다.

냉전이 44년, 세계화는 30년이었다. 이 새로운 상태도 꽤나 길게 지속될 것 같다. 아름다운 저비용의 시절은 가고, 얼어붙은 고비용의 세상이 시작된다. 수출한 돈으로 수입해 먹고사는 우리는 값을 더 치를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영창 산업2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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