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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출생' 못 막은 '저출산 예산' 280조... "육아, 여성 몫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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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계출산율(출산율) 0.75명.’
임신할 수 있는 여성 네 명에게서 겨우 세 명의 아이가 태어난다는 뜻이다. 16년간 280조 원 규모의 예산을 쏟아부은 결과가 고작 저것이냐고 얼마 전 국무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한숨을 쉬며 가리킨, 올 상반기 한국의 현실이기도 하다. 들인 돈은 조 단위로 치솟는데, 바닥(0)을 향해 곤두박질치는 출생률에는 날개가 돋지 않는다. 이제는 ‘백약이 무효’라는 판단에서였을까. “기존 정책이 출산율 높이는 데만 초점을 맞췄다. 반성해야 한다”는 윤 대통령 지적은 '저출생' 대응 포기 시사다. 바야흐로 ‘적응의 시대’가 도래한 셈이다.
물론 저출생 대책은 실패다. 꾸준히 줄어 2005년 1.09명까지 추락했던 출산율은 예산이 투입되자 이듬해 당장 1.13명으로 반등하더니, 전반적 회복 기조 속에 2012년 1.30명까지 올랐다. 턱걸이로 ‘초저출산’ 상태를 면한 것이다. 하지만 거기가 정점이었다. 다시 내리막을 탄 출산율은 2018년 기어이 0점대에 진입했고, 가속이 붙었다.
돌이켜 보면, 애초 밑 빠진 독에 가까웠다. ‘가족계획’이라는 이름의 오랜 산아 제한 정책이 가임 여성 수를 확 줄인 데다 아이를 많이 낳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규범적 인식을 한국인 머릿속에 심어 놓았기 때문이다. 실기(失期)가 뼈아팠다. 2.1명. 대체출산율인데, 그 아래로 출산율이 내려가면 인구 규모가 유지되지 않는다. ‘저출산 사회’가 되는 것이다. 한국은 1984년 저 지점을 지났고, 그때 멈췄어야 했지만, 축소 지향은 90년대까지 이어졌다.
근 10년 다시 문제가 방치됐다. 2002년 출산율(1.18명)이 초저출산 사회 기준 밑으로 푹 꺼질 때까지도 정부는 문제 파악이 안 됐다. ‘여성 하나에, 아이 하나’라는 상징적이고 상식적인 지표에 위기가 닥치자, 그제서야 180도 태세 전환이 이뤄졌다. 당혹감과 위기감은 호들갑으로 나타났다.
2005년 ‘저출산ㆍ고령사회기본법’이 만들어졌고, 지난해 8월 공개된 국회예산정책처(예정처) 보고서에 따르면, 다음해 곧바로 2조1,000억 원의 정부 예산이 저출생 대응 명목으로 편성됐다. 2013년 10조 원을 가뿐히 넘어선 저출산 예산(14조4,000억 원)은 지난해 46조7,000억 원까지 커졌다. 16년간 잡힌 예산을 합치면 271조9,000억 원이나 된다.
‘헛돈’이었다면 가능성은 두 가지다. 마구잡이로 허투루 썼을 수 있다. 급한 마음에 제대로 따져 보지도 않고 주먹구구식으로 헤프게 퍼부은 것이다. 실제 그런 측면이 없지 않았다는 평가다. 가령, 청년과 신혼부부 대상 주거 지원을 위해 기껏 예산을 들여 공급한 임대주택 가운데 상당수가 빈집으로 남은 것은 정부가 허술하게 수요를 어림짐작하는 바람에 대책의 실효성이 떨어져 버린 사례라는 게 예정처 분석이다. 아니면 ‘불가항력’일 개연성이다. 저출생은 못 막는다는 교훈을 정말 비싸게 얻은 셈이다.
난제가 아닌 것은 아니다. 제동 타이밍을 놓쳐 관성이 질겨졌다. 하지만 저 큰돈의 ‘명목’과 ‘실질’이 달랐다면, 도리어 엉뚱한 용도로 쓰인 돈에 ‘저출산 예산’이라는 이름표가 달렸다면, 체념은 섣부른 것일지 모른다. ‘무늬만 저출산 예산’이 부른 착시 탓에, 정작 저출생 대응에 들어간 돈은 얼마 되지도 않았다는 사실이 간과됐다는 이야기라서다.
아직 시도가 충분하지 못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들여다보면, ‘템플스테이 운영’이니 ‘스마트워크센터 구축’이니 하는 저출생 해결과 무슨 상관인가 싶은 사업이 막 뒤섞여 들어와 있던 게 저출산 예산이었다. 배보다 배꼽이 더 컸다. 저출생 과제 해결을 위해 애쓰는 척 ‘시늉’하고픈 것은 부처 막론 비슷했고, 저출산에 업혀 있으면 사업 예산 따기도 쉬웠다.
그러면 이제라도 출산과 육아 인센티브 강화에 돈을 몰아넣으면 되는 것일까. 실제 그런 움직임이 있다. 윤 정부가 내년 도입 목표로 추진 중인 ‘부모 급여’다. 만 0, 1세 영아 양육자에게 월 최대 100만 원을 현금으로 주겠다는 구상인데, 첫해에만 1조2,000억 원 넘는 재정이 소요되는 사업이라는 게 국회입법조사처의 분석이다.
흐름을 바꾸기 어렵다는 비관 속에서도 저출생 속도를 늦추려는 노력을 정부가 아예 그만두지는 않았으니 다행이기는 하고, 왜 한국의 저출산 예산 내 현금 지원 비중(13%)이 선진국 클럽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51%ㆍ2015년 기준)보다 한참 밑인지 따져 봐야 한다는 조언도 없지 않다(원숙연 이화여대 행정학과 교수). 돈을 똑바로 쓰는 것도 가 봐야 하는 길이다.
하지만 임신ㆍ출산ㆍ육아의 기회비용을 OECD 최고 고학력인 한국 여성한테 현금으로 다 보전하는 것은 어지간한 예산 규모로 어림없는 일이다. 입체적 해법이 필요하고, 이미 다양한 대안이 제시돼 있기도 하다. 예컨대, 난임 시술 지원은 만혼ㆍ노산이 늘며 아이를 낳고 싶어도 못 낳는 이가 많아진 현실에 비춰 볼 때 출산 의지가 있는 사람을 집중적으로 돕는 것이 없는 의지를 만들기보다 더 효과적일 수 있다는 착상에서 비롯된 대책이다.
결혼을 유도하는 것도 방법이다. 2015년만 해도 30만 건을 넘던 혼인 건수는 지난해 19만여 건까지 줄었는데, 정부 분석에 따르면 청년 구직ㆍ주거난이 핵심 배경이다. 이를 완화하는 실효적인 복지 방안을 고민하는 게 저출생 대응을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거꾸로, 결혼과 출산 간 고리를 끊거나 헐겁게 만드는 게 도움이 될 수도 있다. 미국 싱크탱크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PIIE)가 6월 보고서에서 ‘비혼 출산(혼외자)의 법적 차별 금지’를 당장 시도 가능한 한국의 저출생 대책으로 내놓기도 했다.
가능한 선택지로는 ‘수혈’도 있다. 이민 수용이다. 이민자가 늘면 출생이 늘 뿐 아니라 노동시장 수급 불균형이 줄어 얼마간 경제도 성장한다는 게 선진국 경험이다. 그러나 그럴 바에야 우선 한국 여성에게 투자하는 게 비교우위 대책이 될 수 있다. 관심이 미시적이든 거시적이든, 양적이든 질적이든 결과적으로 현재 한국 여성을 구속하고 있는 육아ㆍ가사의 굴레를 벗겨 낼 필요가 있다는 것은 경제학ㆍ사회학ㆍ복지학ㆍ여성학 등 여러 전공 분야의 전문가가 공유하는 문제 의식이다.
일ㆍ양육 병행 여성을 위한 정책 제언은 △보조금 확대 △육아휴직 활성화 △근무시간 조정 △보육 기반 시설(인프라) 확충 등 경제적ㆍ제도적ㆍ물리적 수단을 아우른다. 이봉주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자녀를 안심하고 출산해 키울 수 있도록 사회적 안전망을 완비하는 것을 저출산 대책의 제1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주문한다.
다만 저출생의 근본 원인이 유교사회 가부장 문화인 만큼, 육아가 여성만의 몫이라는 시대착오적 신념과 결별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다는 충고가 나온다. 배은경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어머니 되기(출산)’와 ‘어머니 노릇(양육)’이 개인 여성에게 위험ㆍ부담을 느끼게 만드는 사회에는 희망이 없다”고, 이상민 나라살림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인센티브를 줘 가며 억지로 출산율을 밀어 올리려 하기보다 구조적 문제를 해결해 결과적으로 자연스럽게 출생률이 높아지도록 이끄는 편이 더 효율적”이라고 말했다.
<상> '제로섬' 전락한 출산지원금
<하> 저출생 반전 기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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