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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화해하기까지 너무 오래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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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집안 풍경을 떠올리면, 마루 한편에 놓여 있던 재봉틀을 빼놓을 수 없다. 멋진 목재 장식문이 달려 있던 그 재봉틀로 엄마는 우리 세 남매에게 옷을 만들어주곤 하셨다. 어느 날은 아빠의 헌 와이셔츠가 동생들의 파자마로, 어느 날은 엄마의 헌 블라우스가 내 주름치마로 마법처럼 변신하곤 했다. 열 살도 채 되기 전의 오래된 기억이지만, 젊은 시절의 건강하던 엄마와 코흘리개 꼬마였던 우리 세 남매가 함께한 소소한 일들이 가끔 눈물 나게 그립다. 빛바랜 폴라로이드 사진처럼 세피아 빛으로 희미해져버린, 너무 소중해서 잃어버리고 싶지 않아 자꾸만 되돌려보는 기억들이 있다.
성장하면서 자식들은 점점 부모와 심리적으로 멀어지고, 나름의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생각이 자라면서 부모에 대한 마음이 전과는 확연히 달라지는 시점을 맞게 된다. 나 역시 초등학교 5학년 무렵 부모라고 해도 무조건 믿고 의지할 수는 없다는 걸 알았다. 겉으로는 모범생이었지만, 내면으로는 어른들에게 어느 만큼은 실망하고 어느 만큼은 분노하면서 그렇게 사춘기를 보냈다. 흔히들 말하는 철이 들기 시작한 그 무렵부터 나는 엄마에게 더는 전폭적인 애정과 신뢰를 보내는 귀여운 딸이 아니었다. 그런 내게 서운함을 느낄 때마다 엄마는 "너도 꼭 너 같은 딸 낳아서 엄마 심정 겪어봐라"라고 말하는 걸로 분풀이를 하곤 했었다. 그렇게 투쟁하는 동안 미움받을지언정 엄마 뜻대로 살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대학생이 된 후부터 우리 사이는 더욱 멀어졌다. 우리는 서로 자기 인생을 살기 바빴고, 서로 관심이 없었다. 성인이 된 딸의 눈에 비친 엄마는 더더욱 약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의지할 만한 존재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내가 돌봐야 하는 사람이라 느꼈기에 버겁고 힘들었다. 그렇게 경직된 관계로 화해하지 못한 채 서로 최소한의 의무만 행하며 지낸 시간이 참 길었다. 부모는 내게 날개를 달아주기는커녕 내 발목을 잡아당기는 사람이라 느껴졌고, 가족은 보금자리나 안식처라기보다는 나를 옥죄는 굴레라고 생각했다. 착실해 보이던 청년기에도 나의 내면에는 여전히 풍랑이 일었다.
그렇게 모자란 것투성이인 내가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아 부모가 된 지도 어느덧 이십 년이 흘렀다. 이제야 비로소 지난 시간을 긴 호흡으로 돌아보며 이해할 만한 품이 생겨난 것일까. 최근 부쩍 아프기 전 젊은 날의 엄마 모습이 떠오른다. 사춘기 이후 성장기 내내 나를 힘들게 했던 기억은 모두 엄마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다는 걸 나이 오십이 넘어서야 깨닫는다. 지지와 응원이 필요하던 그 중요한 시기에 왜 우리를 돌보지 못했냐며 내내 원망하는 마음으로 힘들었었는데, 돌아보니 그 원망의 시간만큼 나를 스스로 괴롭혔구나 싶다.
아프기 전 건강하던 시절의 젊은 엄마는 쾌활하고 발랄한 여인이었다. 집안에서도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즐겨 부르곤 하던 엄마, 비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김치전을 굽고, 일요일이면 남다른 모양의 도넛을 튀겨 주던 엄마, 헌 옷을 새 옷처럼 리폼해서 우리를 깜짝 즐겁게 놀라게 하곤 하던 엄마… 그런 즐겁고 행복한 엄마의 모습은 다 잊어버리고, 나는 왜 자기중심적이고 고집스럽던 병들고 아픈 엄마의 모습만 기억했던 걸까? 어리석은 나를 알아차리게 되는 요즘, 아름답던 엄마의 노랫소리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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