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는 일본과 전쟁을 한 적이 있었다"

입력
2022.10.13 19:00
수정
2022.10.13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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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부패해서 망했다" 주장에
반례로 의병전쟁, 안중근 의거 등 제시
1894년 경복궁 수비군, 일본군과 교전

최근 정진석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사이에서 벌어진 설전의 중심엔 '식민사관' 논란이 자리하고 있다. 정 위원장이 이 대표의 발언을 반박하는 과정에서 "조선은 부패 때문에 망했다. 일본은 조선 왕조와 전쟁을 한 적이 없다" "일본은 국운을 걸고 청나라와 러시아를 무력으로 제압했고 쓰러져 가는 조선 왕조를 집어삼켰다" 등의 표현을 사용한 이후 격화됐다.

같은 당의 유승민 전 의원조차 안중근 의사 등을 반례로 거론하면서 "이게 우리 당 비대위원장의 말이 맞나"라며 비판을 제기할 정도다. 정 위원장은 이런 비판 속에서도 "진의를 호도하고 왜곡하면 안 된다. 역사 공부를 좀 해야 한다. 그건 식민사관이 아니라 역사 그 자체"라며 기존 발언을 고수하고 있다.

일본군에 맞선 의병에 해산 대한제국 군인 합류

1907년 항일 의병 운동에 가담한 전직 군인과 의병을 촬영한 유명한 사진. 영국 언론인 프레더릭 매켄지가 찍어서 서방에 알린 사진은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도 재현된 바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07년 항일 의병 운동에 가담한 전직 군인과 의병을 촬영한 유명한 사진. 영국 언론인 프레더릭 매켄지가 찍어서 서방에 알린 사진은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도 재현된 바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그렇다면 조선 왕조와 일본이 전쟁을 벌인 적이 없을까. 우선 해당 발언의 손쉬운 반례는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과 1597년 정유재란(조일전쟁)의 존재다. 명확히 조선 왕조와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정권의 전면전이기 때문. 하지만 이 전쟁은 맥락상으로 가리키는 조선 말기와는 대략 300년의 거리가 있다.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을 강점하기 직전인 조선 말과 대한제국 시기에는 표면상으론 조선 왕조가 일본과 전쟁의 형태로 충돌하지 않았다. 일본에 의한 조선의 국권 침탈은 군사적 압력을 동반하기는 했지만, 대부분 조약의 형태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이 조선을 강점하기 전에 조선과 벌인 '전쟁' 자체가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현재 역사학계에선 조선 멸망 전 크게 세 차례에 걸쳐 발생한 의병 전쟁을 일본과 조선 왕조의 사실상의 전쟁으로 간주하고 있다. 김학규 동작역사문화연구소장은 지난 12일 TBS라디오 '신장식의 신장개업'에 출연해, "내용적으로 보면 조선 왕조가 직접적으로 일본과 맞서 싸울 능력이 없다 보니 의병 전쟁이라고 하는 걸 매개로 해서 전쟁을 한 거고 그 과정에서 패배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청일전쟁의 단초가 된 것으로 알려진 최초의 동학농민운동은 지방관의 수탈에 대한 항의였다. 하지만 청일전쟁 이후 발생한 2차 봉기부터는 '척왜근왕'을 내걸게 된다.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에 반발한 을미의병, 을사조약과 정미조약에 각각 반대한 을사·정미의병도 모두 고종과 조선 왕정을 수호하려는 근왕 운동이었으며, 고종 역시 이들을 은밀히 지원했다.

1907년에는 정미조약을 근거로 일본이 대한제국 국정에 개입해 군대를 해산시키자, 군 부대가 해산 명령을 거부하면서 일본군과 교전하는 '남대문 전투'가 발생하기도 했다. 대한제국군은 이후 대거 의병에 합류하면서 의병 투쟁을 길게 이어갔다. 한반도 주둔 일본군은 '남한 대토벌 작전' 등 대규모 작전으로 이를 무력 진압했지만, 일부는 만주와 연해주에서의 독립 투쟁으로 연결됐다.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에 항전한 조선 수비군


1894년 발생한 경복궁 점령 사건의 전말과 일본의 해석을 다룬 나카쓰카 아키라의 저서 '1894년, 경복궁을 점령하라'의 책표지.

1894년 발생한 경복궁 점령 사건의 전말과 일본의 해석을 다룬 나카쓰카 아키라의 저서 '1894년, 경복궁을 점령하라'의 책표지.

외형상 농민과 유생 등이 자발적으로 결성한 의병, 해산 조치에 불응한 대한제국 군인은 조선 왕조가 아니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조선 왕의 명령을 받는 관군이 일본군과 교전한 사건도 존재한다. 1894년 청일전쟁 직전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때 실제 전투가 벌어졌다.

1차 동학농민운동 당시 조선은 민란 진압을 위해 청에 출병을 요구했는데, 일본도 임오군란 때 청과 맺은 톈진 조약을 들어 동시에 병사를 보냈다. 이후 정부와 동학군이 화의를 맺어 더 이상 군대를 주둔할 명분이 없어지자, 일본은 철군을 거부했고 그해 7월 23일 결국 경복궁에 군대를 투입해 고종을 위협했다.

일본이 1904년에 펴낸 '일청전사'를 보면 이 사건을 두고 "경복궁을 수비하던 조선군이 경복궁 근처를 지나가는 일본군을 갑자기 공격했고, 일본이 이에 대응해 왕궁을 지켰다"고 적고 있다. 우발적 충돌이 계기이고 어디까지나 평화 유지를 위한 조치였다는 식의 서술이다.

하지만 일본의 역사학자 나카쓰카 아키라는 당시 일본군이 치밀한 계획하에 경복궁 점령 작전을 수행했다는 일본 측의 사료를 발견했다. 조선의 수비군이 일본군의 침입에 맞서 정당하게 항전했으며, 하루 동안 궁궐을 지키기 위해 격렬하게 저항하다가 일본군에 붙잡힌 고종의 교지에 의해 해산됐다는 내용도 드러났다.

'7·23 경성 사건'이라고도 불리는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은 청일전쟁의 시작을 알린 사건이지만 이와는 별도로 일조전쟁(日朝戰爭)이라는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경복궁 점령이 조선 정부 자체의 의지가 없었던 온전한 침략 행위였다는 얘기다. 이후 수립된 김홍집 내각은 개혁 정책을 실행했지만 일본의 입김이 작용한 것도 사실이었다. 당시에도 김홍집 내각은 친일 정권이라는 인식 속에 고종이 1896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후 붕괴됐다.

독립운동으로 계승된 안중근의 '전쟁 포로' 요구

안중근 의사의 삶 마지막 1년을 소재로 만들어진 뮤지컬 ‘영웅’의 한 장면. 한국일보 자료사진

안중근 의사의 삶 마지막 1년을 소재로 만들어진 뮤지컬 ‘영웅’의 한 장면. 한국일보 자료사진

한국의 초대 통감을 지냈던 이토 히로부미를 1909년에 암살한 안중근 의사가 재판 과정에서 독립 의병장을 자처한 것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안중근은 재판 과정에서 자신이 대한국 의병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전투 행위를 했고, 스스로를 만국 공법상 전쟁 포로로 대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그를 재판한 뤼순의 일본 법원은 이를 수용하지 않고 형법을 적용해 사형을 선고했다.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에 따르면 안중근의 투쟁은 국권 상실의 책임이 전제군주정에 있다고 보고 민권사상에 의한 민족국가로서 한국의 자주독립을 원했다는 면에서 기존 의병의 근왕주의적 투쟁과 성격상 차이가 있다. 그의 노선은 3·1 운동 이후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민주공화제를 채택하는 방향으로 실현됐다.

김학규 소장은 "(구한말) 대한제국은 대한제국대로 고종은 고종대로 자신의 살 길을 찾았고, 백성들 가운데선 공화국을 만들려는 사람, 입헌 군주국이라는 방식을 채택하려던 사람 등 다양한 노력이 있었다"면서 "이러한 노력을 일거에 무력화시킨 게 바로 일본의 침략이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인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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