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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2002' 배경은 반드시 홍대로

입력
2022.10.15 07:30
13면

<27> 서울 홍대

편집자주

부부 소설가인 강보라 박세회 작가가 동네에 얽힌 사회 문화적 단편을 감성적 필치로 담아냅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홍익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초등학교로 전학가면서 홍대 문화권과 처음 인연을 맺게 됐다. 한국관광공사 제공

초등학교 3학년 때 홍익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초등학교로 전학가면서 홍대 문화권과 처음 인연을 맺게 됐다. 한국관광공사 제공

홍익대학교 문화권과 처음 인연을 맺은 건 나를 때리던 선생님 덕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로 기억한다. 숙제를 예쁘게 안 해왔다며, 글씨를 바르게 못 쓴다는 이유로 맞았다. 워낙 꾸미는 걸 못하는 성격인데다, 유전적 악필인데 뭘 어떻게 하라는 건지. 잘못한 것도 없이 매일 매를 맞고 오는 나를 보다 참지 못한 어머니가 어느 날 학교로 선생을 찾아갔더랬다. 알고 보니 당시엔 학교에 찾아갈 때 과일 바구니에 촌지를 넣어가는 게 관례였다. 우리 어머니도 바구니를 가져가긴 했는데, 정말 과일만 넣어갔다. 그 선생은 주연이 빠진 바구니에 더욱 크게 분노했는지 그날 이후 더 자주 나를 때렸다. 안타깝게도 내 어머니는 자존심을 버리고 촌지를 쥐어주는 타입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럴 돈이면 가난한 살림에 무리를 해서라도 촌지 문화가 없는 사립학교에 보내겠다며 홍익대 사범대학 부속초등학교로 나를 전학 시켜버렸다.

그 뒤로는 신나는 날의 연속이었다. 번화가에 작은 레코드 가게 하나 있는 게 전부였던 서울의 변두리 화곡동에서 129번 버스를 타고 범 신촌권인 홍익대 안에 있는 초등학교로 등교하는 과정 자체가 초등 3학년 아이에겐 모험이고, 여행이었으니까. 가끔은 치약 코와 눈 아래 바르고 매케한 공기를 헤치며 등교하는 날도 있었는데, 그럴 때면 두려움과 함께 묘한 흥분이 몸을 감쌌다.

지난 3월 20일 오후 서울 마포구 홍대거리에 사람들이 걸어다니고 있다.. 뉴스1

지난 3월 20일 오후 서울 마포구 홍대거리에 사람들이 걸어다니고 있다.. 뉴스1

부모님은 좌석버스를 타고 다니라며 차비와 용돈 조로 매일 1,000원을 주셨는데, 나는 항상 시내버스를 타고 남은 돈을 아껴 모험과 신비에 썼다. 앉아서 갈 수 있는 걸 서서 가는 고생을 내 몸으로 버텨가며 번 돈이라 양심의 가책 따위는 느끼지 않고 횡령했다. 여름이면 그 돈으로 지금의 홍대 정문 앞 삼거리 있는 편의점 세븐일레븐에서 오렌지나 포도맛 슬러시를 먹었다. 아...슬러시를 처음 만났던 날, 그 혀에 닿는 오묘한 촉감과 ‘띵’하고 머리를 울리던 쾌감을 아직도 기억한다. 화곡동까지 들고 가면 이미 다 녹아 없어질 터라 동네 친구들에게 보여주지 못하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또 리치몬드 제과점의 슈크림이 있었다. 바닐라 씨앗이 알알이 박혀 있는 녹진한 크림이 잔뜩 찬 포동포동한 슈크림은 우리 동네 제과점에서 파는 베이비 슈크림빵과는 차원이 달랐다. 먹자 골목도 잊을 수가 없다. 지금 홍대 걷고 싶은 거리가 있는 곳에는 거의 쓰러져가는 연립상가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는데, 즉석 떡볶이며 순대, 튀김 등의 분식을 팔았다. 이틀 정도 슬러시와 슈크림의 유혹을 이겨가며 좌석 버스비를 모으면 친구들과 떡볶이를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같은 버스를 타는 친구들끼리 돌아가며 샀던 그 떡볶이가 초딩의 고단한 인생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홍대는 그 시절에도 이미 화곡동 소년이 경험할 수 있는 미식 문화의 최전선이었던 셈이다. 만화주간지 아이큐점프에는 드래곤볼이, 소년챔프에는 슬램덩크가 절찬 연재 중이던 시절의 이야기다.

지난 4월 자정을 넘기 시간 서울 마포구 홍대 인근의 한 클럽 앞이 북적이고 있다. 뉴스1

지난 4월 자정을 넘기 시간 서울 마포구 홍대 인근의 한 클럽 앞이 북적이고 있다. 뉴스1

가장 격렬한 문화적 충격을 받았던 곳도 홍대였다.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처음으로 홍익대 인근에 있는 몇몇 클럽을 중심으로 언더그라운드 뮤직 신이라는 게 생겼다는 얘기를 들었다. 용기를 내서 처음 가본 클럽이 드럭이었다. 공연장 입구에는 헤어 스프레이로 강철처럼 단단하고 송곳처럼 날카롭게 벼린 헤어스타일을 한 무섭게 생긴 형들이 담배를 뻑뻑 피우고 있었다. 2019년에 그 무섭게 생긴 형들과 다시 만나 인터뷰를 할 기회가 있었다. 밴드 결성 25주년을 맞은 크라잉넛이었다.

크라잉넛은 그날 인터뷰에서 “당시의 홍대는 정말 뜨거웠다. 겨울에 공연을 하면 드럭에 있는 조그만 한 창문에서 불난 것처럼 연기가 막 났다. 공연장에 땀 때문에 구름이 생겨서 천장에서 비가 내렸다”라며 “진짜다. 농담도 과장도 아니다”라고 나를 설득하려 들었다. 그런 말로 나를 설득할 필요는 없었다. 나 역시 그 현장에서 땀 비를 맞은 사람 중 하나였으니까. 스탠딩으로 잘해야 50명이 들어갈까 말까 한 공간에 100명이 훌쩍 넘는 사람들이 김밥의 밥알처럼 빼곡하게 겹쳐 쌓여서는 정신줄을 놓고 서로 부대끼며 모싱하고 점핑하며 부딪히던 장면은 불법적으로 보일만큼 충격적이었다. “숨 쉬는 게 힘들어서 노래 부르려고 약국에서 휴대용 산소호흡기를 사왔다”는 보컬 박윤식의 증언이 기억에 남는다.

2000년대 초 홍대를 중심으로 한 언더그라운드 뮤직 신에서 만난 밴드 크라잉넛은 가장 격렬한 문화적 충격을 줬다. 드럭레코드 제공

2000년대 초 홍대를 중심으로 한 언더그라운드 뮤직 신에서 만난 밴드 크라잉넛은 가장 격렬한 문화적 충격을 줬다. 드럭레코드 제공

대학 시절 수업이 끝나고 과 동기들이 신촌 거리에서 세계 맥주를 마실 때 나는 홍대로 넘어갔다. 펍들을 전전하며 아르바이트를 했다. 돈을 벌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나와 비슷하게 홍대병에 걸린 누군가와 친해지고 싶어서였다. 밴드를 결성하기 위해 충남에서 올라왔다는 형과 친해졌고, 드럼을 치기 위해 안산에 사는 부모 집에서 독립했다는 누나와 친해졌다. 그들이 사는 옥탑방에서, 반지하에서, 다세대가 아닌 다가구 주택의 단칸 방에서 벨 앤 세바스찬의 노래를 들으며 맥주를 마셨다. 아마 그 시절 그런 무리가 홍대 앞에 수천 개는 되었을 것이다. 라이브클럽 빵에서 놀던 슈게이징(1980년대 중반 영국에서 시작된 인디 록 흐름)파들, 공연장 스컹크헬에서 놀던 펑크족들도 누군가의 자취방에서 저마다의 음악을 들으며 술을 마셨고, 결국엔 고스족와 체크 남방들이 섞여 노는 희한한 풍경도 벌어졌다.

어째서인지 다들 하나같이 사춘기 때 본 야자와 아이의 '나나'를 세상에서 가장 감명 깊게 읽은 만화 책으로 꼽았고, 당시엔 해롤드 사쿠이시의 'BECK(백)'을 읽을만 하다고 말했다. 또 다들 딱히 잘 다루는 악기도 없으면서 당장 내일이라도 (브릿팝 밴드) 스웨이드 쯤의 밴드는 결성할 수 있을 것처럼 말했다. 우리는 서로의 그런 면을 무시하지 않았다. 난 너 믿잖아. 너가 곡을 쓰면 정말 짱일 것 같아. 밴드 꼭 해라. 그렇게 말해줬다. 마음만 제대로 먹으면 세상의 무엇이든 될 수 있지만,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 꼭 멋진 모습은 아니라는 이상한 시대정신이 모두의 뼛속까지 침투해 있던 괴상한 시대의 이야기다. 기타 연습은 안 하면서 밤새도록 최고의 기타리스트만 꼽아대던 홍대의 ‘혀타리스트’들은 다음 날 일어나 친구의 옷을 입고 등교했고, 다른 친구의 집으로 하교했다. 나만 그렇게 사는 게 아니었다. 그때는 새벽 3시에 홍익 보쌈 인근이나 지금의 삼거리포차가 있는 골목에 가면 내일이 없는 청춘들이 술병을 좇아 좀비처럼 몰려다녔다.

2015년 문을 닫은 홍대 라이브 클럽 프리버드 무대. 20년간 한국 인디 록 밴드들의 요람 역할을 했던 장소다. 프리버드 제공

2015년 문을 닫은 홍대 라이브 클럽 프리버드 무대. 20년간 한국 인디 록 밴드들의 요람 역할을 했던 장소다. 프리버드 제공

에디터로 일하다 나와 나이가 비슷한 문화계 쪽의 사람들을 만났을 때 ‘홍대’가 화제에 오르면, 묘한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한다. 누군가가 마치 고백하듯 “아...홍대요. 저도 홍대 좋아했죠”라는 어색한 시제의 어미로 말을 맺는다. 그럴 때 우리는 비슷한 기억을 머릿 속에 떠올릴 것이다. 서교초등학교 인근에 있는 빨간 벽돌로 된 다가구 주택의 쪽문을 열고 까치발로 친구의 자취방에 몰래 기어들어가던 어느 밤을, 앞으로는 자기를 나나라고 불러달라던 친구에게 아무 부끄러움 없이 나나라고 불렀던 날들을. 그러면 또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이십대 때는 매일 홍대에 갔어요. 진짜 거기서 쓴 술값만 착실하게 모았으면 오년 전에 아파트 하나는 살 수 있었을 걸요”라고 말한다. “클럽은?”이라고 물으면 십중팔구는 엠투, 엔비, 명월관, 스카에 다녔다.

이제 '응답하라 2002'가 나올 때가 됐다. '응답하라 1994'가 나왔을 때가 2013년이니까, '응답하라 2002'가 나온다면 올해 아니면 내년이 적기다. 배경으론 어디가 좋을까? 신촌을 배경으로 한 '응답하라 1994'가 큰 인기를 끌었을 때 이 드라마의 프로듀서인 신원호는 “강남은 특정한 사람들이 놀던 곳인 반면 신촌은 이십대 초반의 보편적 대학생들이 노는 곳이었다”고 말했다. 1994년에 대학에 입학한 세대들은 X세대의 심장이었고 X세대들에게 보편의 장소는 신촌이었다. 한편 홍대는 2000년대 이후 학번인 밀레니얼들이 청춘을 묻은 곳이다. '응답하라 2002'의 예상 시나리오와 배경이 뻔하다해도 무조건 재밌을 것이다.

신촌 대학가를 배경으로 했던 tvN 인기 드라마 '응답하라 1994' 후속으로 '응답하라 2002'가 나온다면 배경은 홍대가 딱 맞다. CJ E&M 제공

신촌 대학가를 배경으로 했던 tvN 인기 드라마 '응답하라 1994' 후속으로 '응답하라 2002'가 나온다면 배경은 홍대가 딱 맞다. CJ E&M 제공

야자와 아이의 '나나'를 읽은 시골 학생이 반드시 인디밴드가 되겠다며 상경을 결심한다. 그러나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되 대학 졸업만은 꼭 하거라”며 대입을 권유하는 부모님. 어느 날 음악 잡지 서브를 사서 읽는데, 유명한 밴드들은 전부 홍익대 인근 서교동의 펍에서 공연 중이다. 드럭에서 코코어란 초미남 밴드가 결성되어 인기를 끌고 있단다. 기타 연습은 잠시 접어두고 인서울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공부에 매진하는 우리의 주인공 현우. 홍익대 전자과 합격과 동시에 아버지로부터 콜트 기타를 선물 받는다. 기타를 손에 쥐고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지만, 막상 서울에 가보니 다른 기타 동지들의 손에는 모두 펜더기타가 들려 있고, 이쯤에서 “진짜 기타리스트는 악기를 가리지 않는 법이지”라는 진부한 대사가 한번 나와 줄 만도 하다.

홍대 앞의 펍 스미스를 아지트처럼 들락거리게 된 주인공은 그 곳에서 강남 출신의 연대 의대생 베이시스트 승호와 엄청난 미모의 소유자지만 자신이 예쁘다는 걸 아직 자각하지 못한 보컬리스트 유나를 만나 자유림이라는 밴드를 결성하게 되는 얘기는 어떨까? 2002 월드컵 포르투갈 전 때 박지성의 슛이 들어가는 순간, 현우와 유나가 이성을 잃고 첫 키스를 하는 장면이 들어가도 좋겠다. 그 장면을 멀리서 지켜보는 승호와 그런 승호를 짝사랑하는 키보디스트 예림이. 어쩌면 당신은 “홍대에 청춘을 묻었지”라고 말하는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신의 친구 중 적어도 한 명이 그 비슷한 말을 하는 걸 들은 적은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 드라마는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박세회 (소설가·에스콰이어 피처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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