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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어머님이 베풀어주신 환대의 기억

입력
2022.10.06 22:00
27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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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율이 1,400원이 넘었다. 물가 오르는 속도는 아찔하다. 식당에 가면 먹고 싶은 음식보다 가격표에 먼저 눈이 간다. '갈비탕 1만5,000원, 제육볶음 1만2,000원. 이제 식당에서 밥 먹으려면 만 원이 훌쩍 넘네?' 그러다 보니 누군가에게 선뜻 밥 사줄게라는 말을 쉽게 못 하고, 누군가 밥을 사주겠다 하면 미안함과 고마운 마음이 앞선다. 내 돈 귀한 줄 아니 남의 돈도 귀하다는 걸 아는 어른이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게도 타인의 사정은 생각하지 않고 얻어먹기만 했던 지난 시간이 있다.

밥 먹고 뒤돌아서면 배고팠던 초등학생 시절. 수업이 끝나면 친구네 집으로 향한다. 친구가 간장 국수를 만들어주겠다며 큰 냄비에 물을 올린다. 나는 양념통을 찾아서 친구에게 가져다주고, 냉장고에 있는 김치를 꺼내 덜어놓는다. 매일 오다시피 하니, 친구네 집에 숟가락은 몇 개인지, 프라이팬은 어디 있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린다. 친구 어머님이다. "경희 왔구나! 학교 잘 갔다 왔어? 국수 만들어 먹고 있었네. 김밥 사 왔는데 같이 먹어." 시장에 다녀온 친구 어머님이 서둘러 김밥을 꺼낸다. 한창 클 때니까 잘 먹어야 한다는 말과 함께 김밥집이 확장한다는 이야기, 중학교는 어딜 가면 좋을지 등 대화를 나눈다.

중학생이 되어서도 방과 후 친구네 집으로 향하는 건 변함없다. 시험 기간이니 밤새워 공부한다는 핑계로 친구네 집에서 잠을 자기로 한다. 결국엔 다 보지도 못 할 교과서와 문제집을 가득 챙겨 친구네 집에 도착했다. "왔어? 시험공부 하기로 했다며, 그러면 든든히 먹어야 해, 갈비 먹으러 가자." 친구의 엄마는 딸의 친구들을 데리고 근처 갈빗집으로 데려가 양껏 고기를 먹인다. 집으로 가는 길에는 공부하다 배고프면 과자 먹으라고 슈퍼에 데리고 간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대학생이 되어서도 어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친구 집에서 늘 환대 받으며 밥을 먹었고, 친구 가족들과 스스럼없이 외식을 함께 했다.

어른이 되었고 돈을 번다. 밥을 얻어먹기보다 사줘야 하는 상황이 더 많아진다. 문득 지난날, 단 한 번도 싫은 내색 없이 환대해 주고, 밥을 해주고, 사줬던 친구 어머님이 생각난다. 늦기 전에 마음을 전하기로 한다. 용돈을 보내드리고는 전화를 걸었다. "어머님, 저 어렸을 때부터 집에 자주 갔는데 그때마다 맛있는 거 해주시고, 또 사주시고, 너무 감사했어요. 제가 돈 벌어보니까, 그게 절대 쉬운 게 아니더라고요. 꼭 한 번 용돈 드리고 싶었는데 이제야 드려요!" 어머님은 생각도 못 했다며, 언제 이렇게 다 커서 용돈을 주냐 말씀하신다.

20년이 훌쩍 흘러서야 어른이면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이 당연한 일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가장 편히 쉬고 싶은 집에 매일 딸의 친구들이 오는 일이, 잠을 자고 가는 일이 매번 좋았을 리가. 밥을 먹이고 사주는 일이 부담스럽지 않았을 리가. 그런데도 조금의 싫은 내색 없이 늘 맛있는 음식으로 대접해주셨던 것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베풀고 살아야 하는데 돈 앞에서, 밥 한 번 대접하는 일 앞에서 자꾸 멈칫하고 재는 순간이 많아진다. 그런데도 기꺼이 환대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리라 믿는다. 내게는 친구 어머님께 받은 환대의 기억이 있으니까.


김경희 오키로북스 전문경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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