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거 없는 성범죄도 입증 자신"... 'K진술분석' 기법 개발한 프로파일러

입력
2022.10.06 15:15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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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진술분석 방식 첫 개발한 최규환 경위
진술 엇갈리는 성폭력 진실 잇따라 규명 성과
"입증 두려워하지 말고 피해자 적극 용기 내야"

충남경찰청 과학수사대 최규환 프로파일러(경위)가 2020년 12월 한국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충남경찰청 과학수사대 최규환 프로파일러(경위)가 2020년 12월 한국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고교생 A(18)양은 지난해 1월 마을이장 B씨를 고소했다. 9세와 14세 때 B씨가 속옷에 손을 집어넣고 입술을 갖다 대는 등 강제추행을 했다며 “이제라도 죗값을 묻고 싶다”고 했다. 수사는 쉽지 않았다. 13세 미만 미성년자 강제추행죄는 공소시효가 없지만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폐쇄회로(CC)TV나 목격자 등 핵심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경찰은 고민 끝에 ‘한국형 진술 분석 기법(K-SCAM)’의 권위자인 충남경찰청 프로파일러 최규환 경위에게 사건을 의뢰했다.

최 경위는 “피의자 진술이 부자연스러워 신빙성이 낮다”고 결론 내렸고, 수사팀은 A양 진술을 근거 삼아 B씨를 검찰에 송치했다. 법원은 그 해 11월 B씨에게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했다. 최 경위의 ‘진술평가결과 보고서’를 주요 증거로 받아들인 것이다.

K-SCAM이 성범죄 사건 해결에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독일의 준거기반 내용분석(CBCA), 이스라엘의 과학적 진술 분석 기법(SCAN) 등 선진 수사 방식을 우리 실정에 맞게 변형한, ‘한국형 진술 분석’ 기법으로 최 경위가 2020년 1월 개발했다.

K-SCAM의 효용성은 수치로 드러난다. 2020년부터 올 3월까지 K-SCAM을 실시한 65건 중 63건이 실제 수사 결과와 일치했다. 또 증거가 불분명한 성범죄 사건 가운데 ‘피의자 진술이 거짓’이라는 K-SCAM 분석 결과를 토대로 경찰이 검찰에 송치한 43건 중 2건을 제외한 41건이 기소됐다.

이 기법의 특징은 피해자와 피의자 진술을 버무려 교차 검증하는 데 있다. 가ㆍ피해자 진술을 따로 평가하는 기존 분석법과 차별되는 부분이다. 또 상황별로 진술의 일관성, 논리적 통일성, 태도ㆍ행동의 조화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한다.

K-SCAM 분석이 빛을 발한 대표 사례가 2년 전 충남에서 일어난 성폭행 사건이다. 피해 여성은 식당에서 같이 술을 마시던 남성에게 강간을 당했다. 가해자는 “피해자가 콘돔까지 줬다”며 합의된 성관계임을 주장했으나 경찰의 판단은 달랐다. 목이 졸리는 등 생명을 위협받는 상황에서 죽음보다 성폭행을 택한 행동, 혹시 모를 임신이 우려돼 콘돔을 제공한 행위 등을 ‘동의’가 아닌 ‘비자발적 승낙’으로 봤다.

최 경위는 “피해자 진술은 상황 묘사가 풍부하고 무엇보다 일관성이 있는 반면, 피의자 해명은 앞뒤가 불일치하는 지점이 많았다”고 설명했다. 가해자는 지난해 8월 1심에서 징역 3년형을 받았다. K-SCAM 분석을 통해 성범죄 유죄 판결을 이끌어낸 경험이 있는 충남 서산경찰서 강인아 수사관은 “사건이 진실게임 양상으로 흐르지 않도록 해 명확한 판단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K-SCAM은 지난달 경찰청이 주최한 ‘제10회 과학수사 아이디어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장비가 아닌 수사기법만으로 법심리 분야(프로파일링, 폴리그래프, 법최면)가 수상한 첫 사례다.

물론 과제도 적지 않다. K-SCAM을 활용할 수 있는 프로파일러가 국내에 40여 명에 불과하고,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아 서울, 경기, 충남 등 일부 지방경찰청에만 도입됐다. 경찰 수사관이라면 누구나 K-SCAM을 이용해 진술 분석이 가능하도록 교육하는 것이 최 경위의 목표다. 그는 “‘내 증언이 입증될 수 있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 성범죄 피해 신고를 주저했던 이들도 적극 용기를 내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나주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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