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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고기를 안 먹겠다는 것뿐인데

입력
2022.10.05 22:00
27면
아내와의 주말 나들이에서 아내에게 맞는 음식점을 찾을 수 없었던 서울 영동시장 ⓒ편성준

아내와의 주말 나들이에서 아내에게 맞는 음식점을 찾을 수 없었던 서울 영동시장 ⓒ편성준

토요일 오후 아내와 서울 강남의 차병원 근처에서 만났다. 걷는 걸 좋아하는 우리는 일을 마치고 강남역 쪽을 향해 무작정 걸었다. 오후 4시 반쯤이었다. 나, 배가 고픈데. 나도 배가 좀 고프군. 아내와 나는 앞다투어 밥을 먹자고 소리쳤다. 회사를 그만둔 이후로 아침은 오전 11시쯤 먹고 점심 겸 저녁은 오후 5시쯤 먹는데 이 날은 낮에 마구 돌아다녔으므로 시장해진 게 당연한 일이었다. 강남역엔 먹을 곳이 마땅치 않아 논현역을 지나 영동시장에 있는 백반집에 갔는데 점심시간에만 '백반정식'을 팔기 때문에 먹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시장 안을 헤집고 다녔다. 아내는 작년 3월에 '페스코 베지테리언'을 선언한 이후로 고기를 먹지 않는다. 육식을 하지 않는 식생활에도 여러 단계가 있는데 페스코 베지테리언은 소, 돼지, 닭, 오리를 안 먹는 대신 해산물 섭취는 가능한 사람이다. 우리가 동네에서 술을 마실 때 치킨집 대신 낙지나 주꾸미 파는 집만 줄곧 다니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순댓국집이 생각보다 많았다. 설렁탕이나 갈비탕, 냉면 등도 육수를 사용하므로 아내는 먹을 수가 없다. 사람들이 이렇게 고기를 많이 먹나, 하는 한탄이 저절로 나왔다. 비건도 아니고 겨우 고기를 안 먹겠다는 것뿐인데 갈 곳이 없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우리 동네에 비건 연기자가 한 명 사는데 그 친구는 촬영장에 도시락을 싸 가지 않으면 끼니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 비건인 사람에게 "오늘은 그냥 참고 이걸 먹으면 안 되나요?"라고 묻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아직도 비건이나 채식주의자가 호사스러운 취미로 비치는 것이다. 아내나 그 친구는 환경과 동물권에 관심이 많았고 특히 공장식 축산에 반대하는 의미로 과감하게 식생활을 바꾼 것이다. 공장식 축사는 60여 년 전에 생겨났는데 거기서 사육되는 동물들은 좁은 철창 안에서 고문 같은 생활을 견디다가 짧은 생을 마감한 뒤 식탁 위에 오른다. 반복적인 출산을 위해 강제로 호르몬제를 투여함은 물론 비좁고 지저분하기 때문에 소독약이나 항생제도 많이 쓴다. 당연히 그걸 먹는 사람에게도 좋지 않다. 가축분뇨는 암모니아 가스를 배출해 대기에도 나쁜 영향을 끼치고 사료 작물을 재배하느라 열대우림을 파괴하기도 한다. 1970년대 이후 아마존 열대우림의 80% 이상이 파괴되었다. 그러나 이젠 공장식 축사에서 기른 동물이 아닌 걸 먹을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아내와 나는 결국 가로수길에 있는 식당에서 '오뎅김치찌개'를 시켰다. 고기 표시가 없어서 시켰는데 막상 국을 저어보니 거기에도 돼지고기가 들어있었다. 한강 작가의 부커상 수상작인 '채식주의자'엔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딸에게 아버지가 억지로 고기를 먹이려는 폭력적인 장면이 나온다. 이런 일은 아주 흔하다. 나도 얼마 전까지는 군대 가서 동성들과 샤워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는 성소수자 얘기를 읽고 '그거 좀 참으면 안 되나?' 생각한 적이 있다. 반성한다. 그건 마치 사회주의자에게 '오늘만 자본주의자로 살아 보라'라고 강요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며칠 전 정지아 작가의 베스트셀러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었다. 거기엔 전향서 한 장을 쓰기 싫어서 평생 갇혀 산 사람도 있고 연좌제 때문에 친인척들에게 평생 원망을 들은 사람도 있다. 신념이란 그런 것이다. 나는 아내가 고기를 안 먹고도 잘 살 수 있으면 하는 작은 소망이 있을 뿐이다.



편성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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