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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증조부 사진 들고 1만㎞ 날아온 멕시코 자매... "한국 가족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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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비, 만두, 국수, 죽… 그리고 아이고 죽겠다!”
화면 너머 그레이스 한(61)씨가 또박또박 한국말로 말했다. 한국계 멕시코 사람인 한씨는 한국어를 전혀 못한다. 하지만 어렸을 때 먹었던 음식 이름, 할머니가 시도 때도 없이 입버릇처럼 달고 살던 말만큼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옆에 있던 동생 엘리자베스 한(57)씨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이스ㆍ엘리자베스 자매는 구한말 멕시코로 이주해 현지 항일투쟁에 매진한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다. 자매는 이민 4세대로 평생 멕시코에 살면서도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잊지 않았다. 이들이 올여름 한국에 있을지 모를 먼 친척을 찾기 위해 1만2,000㎞를 날아온 까닭이다. 지난달 10일 화상으로 자매의 지난 세월을 들어봤다.
자매의 할아버지 한종원(1898~1979)씨와 외증조할아버지 이건세(1887~1948)씨는 1905년 멕시코 남동쪽 유카타주(州)의 주도 메리다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좋은 돈벌이가 있다는 소문에 지구 반대편으로 넘어왔으나, 두 사람을 기다린 건 ‘에네켄(애니깽)’ 농장의 노예 노동이었다. 사람만 한 선인장을 수천 개씩 베고 다듬어 선박용 밧줄을 만들었다.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어김없이 매질을 당했다.
이 악물고 버텨 4년 계약기간을 채웠지만, 1910년 한일병합으로 조국은 사라져버렸다. 두 사람은 독립운동으로 방향을 틀었다. 멕시코 한인 이민자들과 의기투합해 대한인국민회를 조직한 뒤 독립자금을 모금하는 등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뒤늦게 공로를 인정받아 한씨는 지난해 대통령표창을, 이씨는 2017년 건국포장을 받았다. 한씨는 1960년 귀국해 한국외국어대 총장을 지내기도 했다. 자매의 아버지는 멕시코에서 유명 프로레슬링 선수로 활동했다.
자부심 높은 독립유공자 가문임에도 가족은 자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지 않았다. 그레이스는 “부모님은 안 그래도 생김새가 튀는데, 한국어까지 하게 되면 더 많은 차별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부모의 말마따나 차별은 일상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완벽한 멕시코식 스페인어를 구사해도 학교에 가면 늘 중국인, ‘칭챙총(동양인 비하 표현)’ 등의 얘기를 들었다”고 회상했다.
정체성 혼란이 커질수록 ‘뿌리’에 대한 궁금증은 커져갔다. 말만 못했을 뿐, 유년 시절 기억엔 한국이 강하게 박혀 있었다. 어릴 적 잠깐 들른 한국 할머니댁에 가면 늘 상에 둘러앉아 한국 음식을 먹었다. 엘리자베스는 “할머니는 숟가락에 꼳 반찬을 올려주곤 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11월 자매의 어머니는 11년 전 먼저 숨진 아버지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멕시코에는 둘만 남았다. 결국 자매는 7월 무작정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친척을 찾아 한국과의 연결고리를 만들고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외증조할아버지 이씨의 멕시코 외국인 등록증을 들고 정부기관을 돌아다니며 친척을 수소문했지만, “개인정보 보호를 이유로 불가하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그래도 실망하지는 않는다. 그레이스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한국어로 말을 거는 경험은 처음이었다”고 감격해했다.
자매의 ‘친척 찾기’ 프로젝트는 계속된다. 직접 만든 홈페이지(https://www.koreandescendants.com)에는 독립운동가 할아버지들의 이야기부터 프로레슬러 아버지, 자매의 삶이 자세히 소개돼 있다.
“멕시코의 많은 한인 후손들이 ‘투명인간’이라고 자조합니다. 한국사회가 우리의 존재를 모르기 때문이에요. 멕시코 한인을 알리고 한국에 있는 친척들도 만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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