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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질 결심’ 전 다시 보자, 마스크...불신에서 연대의 아이콘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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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크가 없다면 만들어라." 2020년 초 일회용 마스크가 바닥나자 일본에서 퍼진 메시지다. 그해 3월 고후시(市) 여중생들이 '천 마스크' 600여 개를 만들어 시청에 기부했다. 미디어는 이들을 '바람직한 여성상'으로 추켜세웠다. 문부과학성은 집에서 만든 마스크 착용을 학생 등교 방침으로 세웠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는 손으로 만든 마스크를 자랑하는 영상이 유행했다. 마스크 노동은 그렇게 ‘여성의 일’이 됐다.
일본 여성학자 미즈시마 노조미와 야마사키 아사코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센닌바리(千人針)가 떠오른다”고 했다. 당시 일본 여성들은 바느질로 부적 센닌바리를 만들어 참전 군인에 선물했다. 전투에 도움될 리 없지만, 여성은 국가를 위해 무엇이든 해야 했다. 방역 효과가 검증되지 않은 천 마스크 역시 여성 노동력이 손쉽게 동원된 사례다. 한국 가정에서 마스크 관리가 ‘여성의 책임’이 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책 ‘마스크 파노라마’가 보여준 ‘마스크의 젠더화’ 과정이다. 마스크가 그저 방역품이라고 생각하면 오산. 젠더, 인종, 환경 문제가 뒤엉킨 논쟁적 연구 대상이라 불러야 마땅하다. 과학기술학자인 현재환 부산대 교양교육원 교수, 홍성욱 서울대 과학학과 교수가 세계 각지 연구자 11명으로부터 흥미로운 이야기를 받아 책으로 엮었다. 마스크를 둘러싼 권력 투쟁, 문화 차이, 의학적 진보 과정을 폭넓게 이해하면 다음에 마주할 팬데믹에 보다 성숙하게 대응할 교훈을 얻을지 모른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마스크 착용 의무화가 쉽지 않았다. 서양에서 얼굴을 가리는 건 위협적 행위였다. 반대 시위가 빈번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조차 마스크를 기피했다. 진보ㆍ보수를 가릴 것도 없다.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말했다. “인간은 짐승의 주둥이나 사물의 앞면이 아닌 얼굴을 갖는다. 얼굴이 표현하는 바는 마음 상태뿐 아니라 인간 존재의 개방성과 의도적 노출, 다른 이와 소통이다.”
‘개방과 소통’으로 근사하게 포장했지만, 서구 ‘얼굴 공개’의 뿌리는 백인우월주의에 있다. 얼굴과 피부색을 보고 그가 백인인지, 유색인종인지 구분했다. 건강한 사람이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은 ‘이기적’이라는 인식도 컸다. 무증상 감염이 존재한다는 의학적 사실이 밝혀지고 나서야 ‘남을 보호하기 위해’ 마스크를 쓰자는 생각이 퍼졌다. 마스크는 그렇게 문화적 성장통을 거쳐 연대와 이타심의 상징으로 거듭났다.
따지고 보면 ‘정치 방역’이 틀린 말은 아니다. 인간이 정치적 동물이니 마스크도 정치적으로 쓰였다. 중세시대 페스트가 창궐했을 때, 유럽 의사들은 ‘새 부리 마스크’를 썼다. 부리 안에는 ‘공기 정화기’ 격인 허브를 채웠다. 그로테스크한 모습으로 드라마, 영화 소품으로 곧잘 쓰였는데, 사실 상상 속 물건이다. 페스트에서 자유롭던 나라가 질병이 퍼진 지역을 공포스럽게 묘사한 선전 도구다. 현대적 방식의 ‘거즈 마스크’는 1910년대 중국 하얼빈에서 만들어졌지만, 중국 의사들은 영예를 누리지 못했다. 서구 의료 엘리트들은 동양의 성과를 못마땅해 했다.
1930년 경성에서도 마스크를 쓰는 남녀들이 있었다. 조선 지식인들은 이들을 ‘마스크당(黨)’이라고 야유를 보냈는데, 이유는 이랬다. “대체 사람이 감기에 이다지 비겁할 게야 무에 있누. 또 여자의 얼굴의 미란 그 50퍼센트 이상이 상긋한 코와 꼭 다문 입 맨두리에 깃드려 있어”(김기림 시인) 사내대장부가 마스크를 쓰는 것은 유약하고, 여성이 마스크를 써 외모를 가려서는 안 된다는 조선시대적 얘기.
정부가 실외 마스크 의무화를 전면 해제하면서 마스크에서 벗어날 자유가 성큼 다가왔다. 아직 마스크와 '헤어질 결심'이 서지 않은 이들에게 고달팠던 마스크의 인생사, 아니 물건사를 살펴보기 좋은 책. 전 세계에서 한 달에 버려지는 일회용 마스크가 1,290억 개에 달하고, 모두 플라스틱 폐기물로 쌓이거나 바다로 흘러들어간다는 사실도 소개한다. “비말을 잘 막는 마스크가 아니라 자연과 지속 가능한 관계를 만들어 줘야 좋은 마스크다.” (홍성욱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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