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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팝 CD 80%는 매장에 버려져"...'친환경 앨범' 요구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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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김유미(20)씨는 그룹 '스트레이 키즈'의 새 앨범이 나올 때마다 똑같은 앨범을 5~10장씩 산다. 김씨가 보유한 데뷔 5년 차 '스트레이 키즈'의 앨범만 약 60장. 방 한쪽에 쌓여 있는 CD를 들어본 적은? 당연히 없다. 그가 앨범을 사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김씨는 "앨범에 한 장씩 포토카드가 들어 있는데, 멤버가 8명이다. 멤버별 사진도 여러 개라 원하는 멤버의 사진을 모으기 위해 반복적으로 구매했다"며 "처치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이 사면 기부 명목으로 보육원이나 경로당에 보내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요즘 아이돌 팬들은 앨범을 한 장만 사지 않는다. 더 이상 CD로 음악을 듣는 게 목적이 아니라서다. 'CD=음악 앨범'이란 개념은 CD플레이어가 일상에서 자취를 감추고 멜론, 지니 등 음원 스트리밍·다운로드 서비스가 등장하면서 희미해진 지 오래다. 그럼에도 앨범은 잘 나가니, 업계는 버려질 것이 뻔히 보여도 CD를 계속 찍어 낸다. 2017년 1,693만 장이던 K팝 앨범 판매량은 앨범의 '굿즈'화와 K팝 신드롬 현상에 힘입어 지난해 5,709만 장까지 치솟았다.
사양길로 접어들던 음반 시장이 반등한 건 2010년 소녀시대 정규 2집 'Oh!'부터다. 앨범마다 멤버 9명 중 1명의 포토카드를 넣었는데, 이 랜덤 포토카드가 앨범 판매량을 늘리는 일등 공신이 됐다. 팬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멤버의 포토카드가 나올 때까지 똑같은 앨범을 여러 장 사기 시작한 것이다. 팬들 사이에서 포토카드를 사고파는 문화도 이 때부터 생겼다. 인기 멤버의 희귀한 포토카드는 부르는 게 값. 비싼 건 중고 시장에서 100만 원이 넘는다. 대학생 이은수(20)씨는 "똑같은 앨범을 8장까지 사 봤다"며 "내가 원하는 포토카드의 가격보다 앨범을 여러 장 사는 게 더 저렴하다"고 말했다.
대다수 팬 사인회가 '줄 세우기' 방식으로 열리는 것도 과도한 음반 사재기를 부추기는 원인이다. 일정 기간 동안, 앨범을 많이 구매한(앨범당 1장씩 들어 있는 팬 사인회 응모권을 많이 가진) 순서대로 참석 기회를 주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인기 아이돌의 경우 '팬싸컷(팬 사인회 커트라인)' 통과 기준이 통상 보통 100장 이상"이라고 귀띔했다. 팬 사인회에 참석하려면 100장의 앨범을 사야 한다는 뜻이다.
김윤하 음악평론가는 "K팝 신(scene)에서는 발매 첫 주의 초동 판매량을 가지고 팬덤의 규모를 짐작하는 오랜 습성이 있고, 미디어에서도 앨범 판매량 같은 수치에 관심이 쏠리다 보니까 제작사나 팬 모두 앨범 판매량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며 "K팝 시장에서 판매량을 높이기 위한 각종 전략을 만들고 있어 음반 판매량의 증가 추세는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팬들이 포토카드, 팬 사인회 응모권 등 앨범 속 '알맹이'를 챙기고 나면 CD는 자주 쓰레기통으로 직행한다. 29일 서울의 한 대형 음반 판매 매장에서 만난 직원은 "K팝 구매자 80%는 매장에서 CD를 버리고 포카만 챙겨서 간다"며 "우리도 모아 뒀다가 본사에 보내는데 그 쪽에서 폐기하는 걸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계산대 한쪽에는 이렇게 버려진 앨범으로 가득 채워진 상자가 3, 4개 쌓여 있었다. 그는 "인기 그룹 CD가 나올 때는 이 상자를 하루에 20, 30개씩 버린 적도 있다"고 했다. 포켓몬 빵 스티커를 모은다며 빵은 버리고 스티커만 가져가는 행태와 똑 닮았다. 허나 빵은 썩어도 폴리카보네이트, 즉 플라스틱인 CD는 썩지 않는다.
'K팝포플래닛'은 이에 문제의식을 느낀 팬들이 조직한 단체다. 이들은 지난 4월 하이브 사옥 앞에 모여 소속 가수들의 앨범을 반납하며 플라스틱 앨범에 대한 대책 마련을 요구했다. 이날 하이브를 포함해 각 기획사에게 전달한 앨범만 약 8,000장에 달했다. 이다연 K팝포플래닛 활동가는 "앨범을 발매할 때 (플라스틱 쓰레기 배출량이 상대적으로 적은) 디지털 플랫폼 앨범을 고정적인 옵션으로 만들어 달라는 게 저희의 주요 메시지"라고 말했다.
팬들의 요구에 발맞춰 업계에서도 친환경 앨범을 내놓고 있다. 저탄소 인증 용지나 콩기름 잉크로 앨범을 제작하는 데서 나아가 아예 'CD 없는 앨범'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디지털 플랫폼 앨범', '스마트 앨범' 등으로 불리는 이들 앨범은 실물 CD가 없이 일반 QR코드나 NFC 등 디지털 코드를 기반으로 한다.
최근 첫 솔로 앨범을 낸 BTS 멤버 제이홉의 앨범도 QR코드 형태로 만들어진 음반이다. 일단 CD가 빠지니 앨범 부피가 확 줄었다. 스타트업 '네모즈랩'에서 내놓은 스마트 앨범은 신용카드 크기다. 네모즈 앱을 깔아 앨범 속 카드를 NFC, QR, (자체 개발한) 네모코드 등으로 인식해 음원과 사진, 동영상을 감상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전수진 네모즈랩 대표는 "앨범 100장을 사서 90장, 그 이상을 버리는 게 사회 문제가 돼 왔다"며 "무게가 많게는 1㎏까지 나가는 기존 앨범을 60g으로 줄이는 방식으로 친환경 가치를 추구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다만 요즘 같이 K팝 시장이 국내로 한정되지 않는 상황에서, 디지털 기반 앨범이 '빌보드' 차트 집계에 반영되지 않는다는 점은 친환경 앨범 확산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빌보드 200'을 예로 들면 실물 음반 등 전통적 앨범 판매량, 스트리밍 횟수를 앨범 판매량으로 환산한 수치(SEA), 디지털 음원 다운로드 횟수를 앨범 판매량으로 환산한 수치(TEA)를 합산해 앨범 소비량 순위를 산정한다. QR코드로 제작한 제이홉의 앨범 판매량은 국내 써클, 한터 차트에만 집계되고 빌보드 차트에는 반영되지 않는다. 디지털 기반 앨범이 정착하려면 궁극적으로 해외 차트 집계 방식이 변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김영대 음악평론가는 "빌보드가 시대에 맞춰 차트의 기준이나 집계 방식을 바꾸고 있긴 하다"면서도 "USB나 QR 같은 경우 판매량 집계 인증이 명확하지 않다고 보는 시각이 있는 데다, 산업 입장에서 봤을 때 잘 팔리는 CD를 굳이 제외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윤하 음악평론가는 "한국에서도 몇 년 전 지드래곤이 USB로 앨범을 냈을 때 이게 앨범이냐, 아니냐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며 "LP나 CD 같은 '알판'이 있어야 피지컬 앨범(실물 앨범)이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USB든 뭐든 그걸로 음악을 들을 수 있으면 앨범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간의 간극이 큰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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