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4살 차이는 궁합도 안 본다’는 말은 사주팔자에서 연유됐다. 생활 속에서 무심코 사용하는 말과 행동, 관습들을 명리학 관점에서 재미있게 풀어본다.
중국 송나라 유학자 정이(程頥)는 인생에 '세 가지 불행(人生 三不幸)'이 있다고 했다.
먼저 소년등과 일불행(小年登科 一不幸)이다. 어린 나이에 이른 성공으로 교만과 독선에 빠지게 된다. 더 이상의 성취감도 없어 나태해진다. 내려올 일만 남았는데 남은 날이 너무 많이 남았다. 이어 석부형제지세(席父兄弟之勢)다. 대단한 부모와 형제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부모, 형제의 부와 권세는 영원하지 않으며 자기 것도 아니다. 끝으로 유고재능문장(有高才能文章)이다. 타고난 재주와 뛰어난 문장을 지닌 것이다. 이 역시 오만해지고 언젠가는 노력으로 인한 재주에 밀리게 된다.
이 정도 능력과 배경이면 거칠 것이 없다. 실패를 모르고 득의양양하다가 어느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다. 지금도 반복되는 사례다. 따라서 선현들은 젊은 나이에 벼슬을 하거나 재물을 많이 얻는 등의 성공을 경계했다.
현대 들어서는 소년등과와 더불어 중년상처(中年喪妻), 노년빈곤(老年貧困)을 인생의 3대 불행으로 꼽는다.
조선시대 소년등과의 대표적인 인물은 남이(南怡, 1441∼1468)와 이준(李浚, 1441∼1479)이다. 이 둘만이 20대 나이에 오늘날 장관에 해당하는 판서(判書)에 임명됐다. 모두 세조(世祖)의 혈육으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벼락출세'를 했다.
남이는 이시애의 난 평정과 여진 정벌에 공을 세워 27세에 병조판서에 올랐다. 그러나 28세에 역모로 몰려 죽임을 당했다.
특히 이준은 병조판서에 이어, 만 27세에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영의정이 됐다. 조선 역사에 20대 정승은 그가 유일하다. 그가 영의정이 됐을 때, 우의정 김질은 19세나 많았다. 이준이 당시 병마도총사에 임명됐을 때 "나이가 젊고 배우지 못하였는데, 하루아침에 중대한 일을 맡기니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고 사관들은 기록했다. 영의정 이준도 남이가 죽고 석 달 뒤 부친상을 당하자 물러났다. 그는 이듬해 역모에 휘말려 귀양지에서 38세 나이로 죽었다.
두 사람은 '소년 시절 출세하면 끝이 좋지 않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소년등과 부득호사(少年登科 不得好死)'의 대표적인 경우다.
현대 들어 소년등과가 유난히 많은 곳이 법조계(法曹界)다. 어렵고 힘든 시절, 집안에서 똑똑하다는 학생들은 대부분 법대에 진학하고 사법시험에 합격하는 것을 출세의 정규 코스로 여겼다. 소년등과한 이들은 화려한 이력을 바탕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승승장구한다. 그러나 이들 역시 '화려한 봄날'을 끝까지 유지하지 못했다.
정계(政界)에서는 최근 이준석 전 국민의 힘 대표가 '소년등과'로 꼽힌다. 서울 출신인 이 전 대표는 서울과학고와 미국 하버드대 컴퓨터학과를 졸업하면서 수재임을 증명했다. 그러던 중 2011년 12월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에 임명됐다. 사회생활을 임원으로 시작하면서 바로 주류(主流)에 편입한 것이다. 그때 그의 나이 26세였다. 이후 정계 신동(神童) 이준석은 36세에 제1야당의 당대표가 됐다.
소년출세의 특징은 대부분 권력 지향적이나 덕(德)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재승박덕(才勝薄德)은 이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또 이들은 한 번 꺾이면 재기가 어려운 공통점을 보인다. 대부분 현직에 있을 때 인심(人心)을 잃었기 때문이다. 소년등과가 과거나 현재도 으뜸 불행(一不幸)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소년등과의 인재는 필요하다. 이들이 시대정신을 대변하고 사회에 새로운 활력을 가져온다. 따라서 이들이 총명함에 덕성(德性)을 갖추면 천하무적이 될 것이다.
명리학(命理學)에서도 말년(末年) 운(運)을 가장 중시한다. 이를 '후분(後分)'이라 한다. 초년의 좋은 운이 말년까지 가는 경우는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더구나 수명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