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금리 고환율은 시간 지나면 진정
진짜 위기는 세계경제 판 바뀐 것
위기현장에 선 기업 얘기 경청해야
미국 중앙은행이 금리를 한꺼번에 0.75%포인트씩 세 번이나 올리고, 게다가 이게 끝이 아니라고 해서 너무 겁먹을 필요는 없다. 인상이든 인하든 중앙은행의 금리정책은 아기걸음(베이비 스텝) 걷듯 한다는 게 앨런 그린스펀(전 미 연준의장) 이래 정석처럼 여겨졌지만, 사실 그래야 한다는 룰이나 이론은 없다. 오래전 얘기지만 1979~80년 폴 볼커 연준의장은 반년여 만에 기준금리를 9%포인트나 올렸다. 경제적 황금기였던 1990~2000년대엔 '그린스펀의 베이비 스텝'이 옳았지만, 지금의 초인플레 상황에선 '파월의 자이언트 스텝'이 옳다. 물가도 금리도 당장은 숨이 막힐 것 같지만, 언젠간 멈출 것이다. 그사이 부채가 많은 기업과 개인은 고통을 겪을 테고, 주식과 가상화폐 시장이 이따끔씩 발작을 일으키겠지만, 경제는 어차피 그렇게 거품이 끼고 터지는(boom & burst) 과정을 밟아왔다.
미국 금리 인상 영향으로 원·달러 환율이 1,400원을 넘겼지만, 이 또한 너무 공포를 느끼진 않아도 된다. 우리나라는 환란 트라우마가 워낙 깊어 고환율만 보면 그때의 악몽이 되살아나는데, 사실 외환이 부족하고 환율이 치솟아서 IMF 사태가 일어난 건 아니었다. 그건 결과일 뿐, 원인이 아니다. 거시적으론 경상수지 적자가 누적되고, 미시적으론 눌리고 가려 있던 기업과 금융의 부실이 하나씩 드러나면서 한국경제 신뢰추락→외국자본 이탈→외환부족→고환율 사태로 번졌던 것이다. 미국 금리 인상이 멈추면 환율도 꺾인다. 한국기업, 한국금융, 한국경제의 신뢰가 깨지지 않는 한, 환율 좀 오른다고 해서 제2의 환란은 오지 않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지난 30~40년 한국경제는 참 잘 지내왔다. 여러 위기가 있었지만, 다 잘 넘겼을 뿐 아니라 남들보다 일찍 이겨냈는데, 정부와 국민의 역량 외에 솔직히 외부 도움도 컸다. 수출비중이 압도적인 한국경제에 미국이 펼쳐 놓은 자유무역질서는 최상의 무대였고, 그리고 급성장하는 중국 시장은 최고의 '캐시카우'였다. 거미줄처럼 짜인 글로벌 밸류체인 속에서 한국기업들은 필요한 건 어디서든 구할 수 있었고, 어디서든 값싸게 만들 수 있었으며, 어디서든 팔 수 있었다. WTO와 FTA로 압축되는 냉전 종식 이후 세계자유무역체계, 세계의 공장이자 시장이 된 중국의 부상, 한국은 이 시스템의 최대 수혜국이었다.
그러나 이제 모든 게 바뀌었다. 중국은 더 이상 한국의 캐시카우가 아닐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점차 거리를 둬야 할 불편한 이웃이 됐다. 미국은 자유무역 수호자가 아닌, '아메리칸 퍼스트'만 외치는 보호주의 선도자가 됐다. 곳곳에서 전쟁이 벌어졌거나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밸류체인이 깨지면서 필요한 원료 부품을 제때 구하지 못하고, 제때 제품을 만들지 못하며, 팔지 못하고 있다. 냉전이 끝나고 30~40년 경제적 태평성대를 이뤄냈던 세계경제의 판 자체가 바뀌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압도적 경쟁력을 가진 제품은 사실 반도체뿐이다. 몇 개 더하면 자동차, 배터리 정도. 그런데 미국이 '자국 내 생산'만 고집한다면? 만약 반도체마저 세계 1위 자리를 내준다면? 미국에 맞서 중국이 희토류를 끊고 보복에 나선다면? 러시아가 혹시라도 핵카드를 뽑고 중국이 대만을 침공한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들뿐이다.
달라진 세계경제의 틀, 이게 진짜 위기다. 고물가, 고환율은 정책대응 영역 안에 있지만, 바뀐 판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는 시나리오도 없다. 정치인, 관료들은 관심도 없다. 그나마 목숨 걸고 뛰는 글로벌 대기업들이 우리에게 있는 게 다행이다. 대통령과 각료들이 이들의 얘기를 자주, 무겁게 들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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