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판결은 재판받는 사람에게만 효력이 있지만, 대법원 판결은 모든 법원이 따르는 규범이 된다. 규범화한 판결은 일상생활에 큰 영향을 미친다. 판결과 우리 삶의 관계를 얘기해본다.
합법·불법 논란 속 보편화한 통화녹음
사생활, 음성권 이유로 금지 입법 발의
엄격한 형사처벌 만능주의서 벗어나야
예전에 법원 공보관을 하면서 기자들로부터 '귀대기'라는 속어를 들은 적이 있다. 방이나 사무실 안에서 하는 얘기를 문에 귀를 대고 듣는 것을 귀대기라고 한다는 말을 듣고 참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귀대기는 통신비밀보호법에 위반될 수 있는 행위였다. 통신비밀보호법은 '공개되지 아니한 타인 간의 대화를 녹음 또는 청취하는 행위'를 징역형으로 처벌하기 때문이다. 아직 귀대기 하다가 형사처벌을 받았다는 얘기를 듣지는 못했지만 불륜 배우자 근처에 몰래 녹음기능을 켜 놓은 핸드폰을 숨겨 둬서 대화를 녹음하다가 징역형을 받은 사건을 보기는 하였다.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인지 여부가 일반인에게 늘 분명한 것은 아니다. 대화의 당사자가 아닌 제3자가 청취하거나 녹음하는 것은 처벌대상인데, 3명 이상이 대화를 하는 중 그중 1명이 다른 사람들의 대화를 녹음하는 것은 처벌대상이 아니다. 그런데 판례에 의하면 미용실 주인이 아는 사람을 시켜서 경쟁 업체에 전화를 걸어 귓불을 뚫어 주느냐고 묻고 통화내용을 녹음하게 하는 것은 처벌대상이 된다. 법조인 입장에서도 아리송한데 일반인 입장에서는 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전화통화 녹음은 형사소송, 민사소송 가릴 것 없이 소송에 등장하는 필수 증거자료가 되었다. 변호사들도 의뢰인에게 대화 당사자와의 대화녹음은 처벌대상이 아니라고 하면서 녹음을 권유하고 있으니 더 말할 나위가 있을까? 일반인들도 전화통화나 대화녹음은 상식인 듯 수시로 녹음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최근에 대화 당사자 사이에 동의 없이 녹음하는 것을 처벌하는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이 발의되어 상당한 논란을 겪고 있다. 사생활, 음성권 보호, 통신 비밀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하여 처벌하여야 한다는 의견과 범죄증거 수집 등 공익적 목적을 고려할 때 처벌하면 안 된다라는 의견이 맞서고 있다. 필자도 녹취록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으니 이 논란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다.
그런데 현행법에 의하더라도 전혀 예상치 못한 채 무방비로 대화를 녹음당한 피해를 구제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하급심 법원에서 전화통화 상대방의 동의 없이 통화녹음을 하고 녹취록을 작성한 뒤 법원에 증거자료로 제출한 것과 관련해, 음성권 및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부당하게 침해하여 위법하다는 이유로 손해배상을 인정한 사례가 있다.(물론 배상액은 300만 원으로 크지 않았지만 최근 사생활 침해에 대한 위자료 액수가 상향되고 있음을 고려할 때 지금 이런 판결이 나온다면 이것보다 훨씬 더 큰 위자료 액수가 나올 수도 있다.) 이 판결은 '사람은 자신의 사생활의 비밀에 관한 사항을 함부로 타인에게 공개당하지 아니할 법적 이익을 가지므로, 그것이 공공의 이해와 관련되어 공중의 정당한 관심의 대상이 되는 사항이 아닌 한 비밀로서 보호되어야 하고, 이를 부당하게 공개하는 것은 불법행위를 구성한다'는 대법원 판례에 따른 것이다.
우리나라는 지나치게 모든 문제를 형사처벌로 다루려 하고, 사건사고가 발생하면 엄하게 형사처벌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전과자를 양산하는 형사처벌만이 능사는 아니다. 자신의 권리를 침해당하였다 생각하면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를 하고 그 과정을 통해 자신이 입은 손해를 배상받으면 된다.
대화의 비밀 녹음이 공익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은데 이를 모두 형사처벌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공익 목적으로 녹음하는 사람도 형사처벌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공익 목적의 대화녹음이 상당히 위축되고 범죄행위의 폭로가 어렵게 될 수 있다. 이런 점들을 모두 고려하여 입법에 대한 건전한 논의가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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