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집은 ‘사고 파는 것’이기 전에 ‘삶을 사는 곳’입니다. 집에 맞춘 삶을 살고 있지는 않나요? 삶에, 또한 사람에 맞춰 지은 전국의 집을 찾아 소개하는 기획을 금요일 격주로 <한국일보>에 연재합니다.
경기 양평 명달리 가마봉 인근. 가파른 경사를 따라 한참 오르다 보면 정체를 알 수 없는 박스형 건물들이 등장한다. 빼곡한 잣나무 사이로 환대하듯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건물 네 채의 이름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수십 년 된 잣나무 군락에 최봉국 건축가가 지은 숙소 '아틴마루(Atin Maru)'다. '내면(IN)'에 있는(AT) '마루(산)'라는 뜻의 이름처럼 쉽게 찾기 힘든 깊은 숲속에 자리한 캐빈(오두막)이다.
여느 숲속 오두막이 그렇듯 이곳에선 번잡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보이는 것은 삼면을 둘러싼 잣나무와 위로 보이는 하늘, 들리는 것은 새 소리와 계곡물 소리뿐이다. 이곳의 설계자이자 건축주인 최봉국 BK아키텍처 대표는 "눈 돌리는 곳마다 자연뿐이어서 자연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집을 짓고 싶었다"며 "다른 숙소들과 달리 주변 놀거리, 볼거리, 먹을거리가 없는 숙소"라며 웃었다.
긴 여행의 끝에 남은 '작지만 충분한 집'
'자연으로 들어간 최소화된 집.' 최 대표가 이런 숙소를 구상하게 된 건 '여행'이 계기였다. 10년 경력의 건축가인 그는 하던 일을 접고 3년 전 아내와 딸과 함께 세계 여행을 떠났다. 직접 오프로드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을 운전해 대륙을 횡단하며 2평 남짓한 차를 집으로 삼았다. 러시아에서 출발해 노르웨이와 핀란드를 거쳐 아이슬란드에까지 이르는 1년여의 여정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첫 건축 작업으로 그 여행의 의미를 담은 공간을 구현해보기로 했다. 그는 "여행을 하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차나 캠핑장에서 보냈는데, 사람이 사는 데 꼭 큰 공간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며 "최소한의 공간에서 먹고 자면서 더할 나위 없이 자연을 즐기는 생활을 하고 나니 땅과 건축을 보는 시선이 완전히 달라져 있더라"고 회상했다.
집과 직장을 오가는 평범한 삶을 사는 대다수 사람들에게 세상과 단절된 '최소한의 집'이 행복의 선결 조건이 될 수는 없을 터. 그래서 생각한 것이 잠시 머무를 수 있는 숙소, '스테이'였다. 그는 "모든 사람이 작은 집에 살거나 속세를 떠난 오두막으로 들어갈 순 없겠지만 잠시 머물며 간접 체험은 해볼 수 있다"며 "단출하게 살길 꿈꾸는 이들이 언제든지 찾아와 머물 수 있는 작지만 쾌적하고 프라이빗한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건물 자체보다 땅을 찾는 일이 그래서 중요했다. 단절된 자연에서 명상하듯 머물기 위해서는 어떤 이미지나 소음의 방해도 없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여러 날 찾아 헤매던 끝에 낙점한 곳이 지금 아틴마루가 자리 잡은 땅이었다. 시내에서 한참을 들어와야 하는 한갓진 마을의 끝자락,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만큼 좁은 길을 한참 올라가 닿을 수 있는 언덕에 위치한 1만 ㎡(약 3,000평)의 땅.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가파른 대지에는 인근 건설 현장에서 버린 폐기물과 언제 잘려 나갔는지 모를 나무가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 "심하게 훼손된 상태긴 했지만 오랜 기간 인적이 없었던, 앞으로도 쉽게 찾기 힘든 숨은 땅이었어요. 단절을 경험하기에 이만한 땅이 없었죠."
건축은 땅의 원형을 찾는 일부터 시작됐다. 옛 지도를 참고해 본래의 지형과 산길을 살리고, 주인인 듯 땅을 지키고 있던 나무와 바위의 위치는 최대한 그대로 둔 채로 공용 시설인 라운지와 숙소인 캐빈 4채의 터를 잡았다.
라운지를 포함한 5채의 건물은 극단적으로 단순한 형태다. "건물 자체보다 숲을 드러내기 위해 건축적인 요소를 최대한 덜어냈다"는 설명이다. 리셉션인 라운지는 주변 잣나무를 형상화한 폭 30㎝의 기둥 19개를 세워 만들었다. 13m 높이의 통창을 단 3층 건물 내부는 취사공간과 화장실 등 최소한의 시설만 갖춘 채 비웠다. 가구는 공사 중 잘려 나간 나무를 활용해 단순한 형태로 제작했다. 최 대표는 "건물 내부의 여백을 살리고 창을 크게 만들어 시선을 밖으로 향하게 했다"며 "안팎에서 온전히 숲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데 중점을 뒀다"고 설명했다.
자연을 닮은 '무해한 작은 집'
사계절 이름을 붙인 네 채의 캐빈도 마찬가지다. 정면에선 출입문만 보이는 건물은 단순하고 닫힌 인상이다. 프라이버시 확보를 위해 숲 방향으로만 창 하나를 내고 밖으로는 출입구만 둬서 시선을 차단했다. 외부 마감재는 아연 골강판을 쓰되, 번쩍번쩍한 외관이 시간에 따라 변하도록 변색 방지를 하지 않았다. 잣나무의 외피를 닮은 건물의 외관에 자연스럽게 붉은 녹이 내리면서 자연의 일부로 녹아들 것을 의도한 장치라고 한다.
르 코르뷔지에가 가마봉에 캐빈을 짓는다면 이런 모습일까. 잣나무 속에 들어온 듯 나무로 마감한 캐빈은 현대 건축의 거장 르 코르뷔지에가 지중해 연안에 지었던 4평짜리 나무집을 연상케 한다. 나무 벽으로 둘러싸인 26㎡(약 8평) 공간에는 싱글 침대 2개와 책상 등이 단순한 형태의 붙박이 가구로 들어가 있고, 샤워실과 화장실 등을 갖췄다. 여행 중 '4평집'을 일부러 찾아갔다는 그는 "대작을 무수히 남긴 건축가가 가장 아꼈던 집은 4평짜리 오두막이었고, 생의 마지막까지 그 집에 머물렀다"며 "최고의 건축가의 마음이 왜 볼품없는 작은 집에 머물러 있었는지 생각하니 건축가로서 숙연해지더라"고 회상했다.
폐쇄적인 외관과 달리 내부는 트인 느낌이 들게 설계됐다. 전면에는 숲을 바라보는 가로 창을 내고, 측면에는 나무의 옹이나 갈라진 틈을 닮은 길고 좁은 창을 만들었다. 나무 속에서 밖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주기 위한 의도다. 그외 액자나 조명 등 인테리어 장치는 최소화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숲의 풍경에 집중하며 자연과 천천히 가까워질 수 있었으면 했어요. 캐빈 옆에 마련된 덱으로 나가면 한 발 더 다가갈 수 있죠."
전자 기기나 취사가 원천 차단된 환경도 밀도 있는 '머뭄'을 위한 장치다. 인터넷을 하거나 전자레인지를 이용하려면 라운지로 나가야 하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최 대표는 "TV는 처음부터 계획에 없었고, 캐빈 내부에서는 휴대폰의 데이터가 잘 켜지지 않아 아예 신호를 막아버렸다"며 "내 안의 다른 감각을 일깨우기 위해선 분신과 같은 휴대폰을 손에서 놓게 하는 게 먼저"라고 강조했다.
'최소한'이라는 최 대표의 건축 지론을 구현한 캐빈은 말 없는 호응을 얻고 있는 중이다. 홈페이지도 따로 만들지 않고 별다른 홍보를 하지 않는데도 몇 달치 주말 숙박 예약이 꽉 찼다고 한다. "작은 집에 머물며 그림이 된 숲을 보거나, 창밖 너머를 산책하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되는 게 있어요. 덜어낼수록 채워지는 공간의 본질이죠."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