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가 무너지자 한센인들의 삶도 무너졌다

입력
2022.09.17 10:00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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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임대'라고 적힌 경기 남양주시 한센인 정착촌 협동마을의 공장 건물 유리창이 파손돼 있다.

13일 '임대'라고 적힌 경기 남양주시 한센인 정착촌 협동마을의 공장 건물 유리창이 파손돼 있다.


경기 남양주시 협동마을이 과거의 분주한 모습을 잃은 채 황량하다.

경기 남양주시 협동마을이 과거의 분주한 모습을 잃은 채 황량하다.


13일 찾은 경기 남양주시 협동마을이 한때 여러 사업체가 자리 잡았던 빈 건물로 가득하다.

13일 찾은 경기 남양주시 협동마을이 한때 여러 사업체가 자리 잡았던 빈 건물로 가득하다.

같은 애환을 품은 한센인들끼리, 삶의 터전을 공유하게 된 비한센인들도 함께 ‘협동’해 잘 살아보자는 의미로 이곳은 ‘협동마을’이라 불렸다. 한때 70명에 육박하는 한센인이 정착했던 경기 남양주시 협동마을, 이제 마을에 남은 한센인은 고작 20여 명에 불과하다. 주민 숫자가 준 만큼 마을에서는 생기를 찾아볼 수 없다. 과거 거대했던 경제 공동체는 쇠퇴했고 그 여파는 하루하루 버거운 한센인의 삶과 임대료조차 못 내는 영세 공단의 현실로 이어졌다.

지난 13일 협동마을은 이따금씩 드나드는 트럭이 아니었으면 운영 중인 공단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적막했다. 부지 초입부터 늘어선 텅 빈 건물은 깨진 유리창과 시대를 거스른 낡은 전단지로 장식돼 있었다. 입주 기업이 한 곳도 없는 건물도 적지 않았고, 몇 남지 않은 기업들 역시 상하좌우로 폐공장과 삭막한 회색 벽을 맞댄 채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폐공장 내부에는 언제 버려졌는지 모를 폐기물이 가득했다. 폐업한 업체가 야반도주하며 방치한 각종 쓰레기와, 그 위에 폐기물을 슬쩍 얹는 비양심적 소행까지 겹치면서 감히 손댈 엄두가 안 날 지경이다. 쇠퇴한 공업단지의 전형적인 풍경이니 혀 한 번 차고 넘길 수 있겠으나, 문제는 이곳의 현실이 한센인들의 운명과 직결된다는 점이다.


13일 경기 남양주시 협동마을의 폐공장 건물에 대량의 폐기물이 방치돼 있다.

13일 경기 남양주시 협동마을의 폐공장 건물에 대량의 폐기물이 방치돼 있다.


13일 경기 남양주시 협동마을의 폐공장 건물에 대량의 폐기물이 방치돼 있다.

13일 경기 남양주시 협동마을의 폐공장 건물에 대량의 폐기물이 방치돼 있다.


폐공장 내부뿐만 아니라 건물 사이사이에도 각종 폐기물이 방치돼 있다.

폐공장 내부뿐만 아니라 건물 사이사이에도 각종 폐기물이 방치돼 있다.

여느 한센인 정착촌처럼 축산업을 하면서 ‘협동농원’으로 불리던 이 마을이 축사를 헐고 외부 제조업체들을 받아들여 ‘협동산업’으로 탈바꿈한 것은 1970년대 말. 대부분의 한센인 정착촌이 1980~90년대까지 축산업에 매진한 것을 고려하면 상당히 민첩한 업종 전환이었던 셈이다. 한센인 주민들은 당시 공장 경비원 등으로 근무하며 급여를 받고, 입주 기업들로부터 받은 건물 임대료를 배분해 생계를 이어 갔다. 한마디로 한센인들이 비한센인과 경제 공동체를 꾸린 것이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임대료와 경제 호황에 힘입어 당시 협동산업에는 100여 개가 넘는 업체가 입주하기도 했다. 그러나 호황은 영원하지 않았다. 주력 업종이었던 나염·염색 산업이 위축되고 지역 재개발 논의가 오가면서 2000년대부터 기업들이 하나둘 철수하기 시작했다. 현재는 30여 개 업체만 자리를 지키고 있다. 공단 관계자에 따르면 임대료도 제때 내지 못하는 영세업체도 많을 정도로 상황은 좋지 않다. 이날 기자가 만난 업체 대표 역시 상황이 어려워져 직원을 한 명만 두고 있다고 했다.


협동마을에는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수십 년 전의 유인물이 곳곳에 부착돼 있다.

협동마을에는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수십 년 전의 유인물이 곳곳에 부착돼 있다.


협동마을의 이름을 딴 음식점 간판이 흐른 세월에 풍화돼 있다.

협동마을의 이름을 딴 음식점 간판이 흐른 세월에 풍화돼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한센인들은 더 이상 공단에 의지해 생계를 꾸릴 수 없게 됐다. 결국 주민 대다수가 기초생활수급과 소액의 한센인 위로지원금으로 의식주를 해결한다. 평균 연령이 80세에 달하고 고졸 학력조차 손에 꼽을 정도인 정착촌 한센인들이 새로운 생계 수단을 찾는 것은 무리다. 외부 사회의 핍박을 가장 심하게 경험한 이들이라 마을 밖으로 나가는 것도 꺼린다.

다른 정착마을들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국가인권위원회가 2019년 발간한 한센인 인권상황 실태조사 결과보고에 따르면 정착마을에 거주하는 한센인 중 근로소득이나 재산소득이 있는 경우는 조사 대상자 중 각각 1.1%, 3.3%에 불과했다. 한센인 정착마을의 본래 기능이었던 경제 공동체가 완전히 붕괴된 것이다. 특히 정착마을에 모여 사는 한센인들은 개인 집에 거주하는 재가 한센인에 비해서도 자립도가 더 취약하다. 정착마을 한센인들은 교육·소득 수준, 가족교류 빈도, 건강 상황 등 모든 면에서 재가 한센인보다 열악한 상황에 처해 있다. 애초에 한센인 중에서도 가장 기댈 곳 없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정착마을이기 때문이다.

외부인과의 공생을 택한 마을이든 내부 구성원끼리의 자생을 택한 마을이든 경제 공동체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평생을 사회에서 격리돼 살아온 한센인들이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의 보폭에 발맞춰 걷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결국 협동마을에 마지막까지 남은 것은 기댈 곳 없는 고령의 한센인들과 영세한 업체들. 모두가 떠난 자리에 가장 취약한 이들만 남은 셈이다.

편집자주

무심코 지나치다 눈에 띈 어떤 장면을 통해 우리 사회의 다양한 사연들을 소개하려 합니다. 시선을 사로잡는 이 광경, '이한호의 시사잡경'이 생각할 거리를 담은 사진으로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협동마을의 한 폐공장 건물 유리창이 다양한 색의 페인트로 칠해져 있다.

협동마을의 한 폐공장 건물 유리창이 다양한 색의 페인트로 칠해져 있다.


한때 여러 사람들의 일터였을 공장 유리창이 각종 자재로 막혀 있다.

한때 여러 사람들의 일터였을 공장 유리창이 각종 자재로 막혀 있다.


남양주= 이한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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