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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죽IC 옆에 이런 곳이... 성곽길 아래 노란 가을 손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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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일면' '죽이면' '죽삼면'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하며 생겼다. 어감이 험악해 '일죽면' '이죽면' '삼죽면'으로 바꿨다. 그래도 뭔가 어색했다. 이죽면은 다시 죽산면이 됐다. 안성시 동쪽 3개 면은 고려시대의 죽주현에서 분화한 지명이다. 안성 서부에 비해 도시화가 더딘 편이다. 고만고만한 산자락을 끼고 있는 들판에 나지막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어 아직 평온한 농촌 풍경을 유지하고 있다. 지역의 역사를 품은 유적도 곳곳에 남아 있다.
일죽IC는 중부고속도로를 이용해 서울로 올라올 때 상습 정체가 시작되는 곳이다. 목적지가 코앞이어서 마음이 조급해지는데 내비게이션의 도착 예정 시간은 점점 늘어난다. 이럴 때 느긋하게 잠시 쉬어갈 수 있는 곳이 죽주산성이다. 고속도로 나들목에서 불과 5분 거리다. 위치나 전망에 비해 덜 알려진 편이어서 찾는 사람이 많지 않다. 그만큼 한가롭게 즐길 수 있다.
죽주산성을 처음 쌓은 시기는 정확하지 않다. 여러 기록에 의하면 6세기 중반 신라가 북쪽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축성하기 시작했고,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며 꾸준히 보강됐다고 한다. 내성(1,125m), 중성(1,322m), 외성(602m)의 삼중성으로, 적은 병사로 많은 적을 막을 수 있는 구조다. 높이 2.5m 정도인 성벽이 비교적 원형대로 잘 보존돼 있었고, 무너진 곳을 최근 복원해 중성 성곽을 따라 한 바퀴 돌아볼 수 있다.
방문객이 많지 않으니 관광지로서의 면모는 부족하다. 중성 동문터 바로 아래에 약 10여 대를 댈 수 있는 주차장이 전부다. 사각의 창처럼 남은 동문 석축을 통과하면 산자락에 둘러싸인 타원형의 성터가 모습을 드러낸다. 숨겨진 마을처럼 아늑하다.
제일 위쪽에 충의사라는 송문주 장군 사당이 있다. 고려 고종 23년(1236) 몽골의 3차 침입 때 죽주 방호별감을 지낸 인물이다. 성곽길이 시작되는 지점에 ‘신출귀몰한 신명(神明) 송문주’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몽골군이 산성을 에워싸고 보름간 온갖 방법으로 공격했지만, 끝끝내 성공하지 못하고 결국 사용하던 병기를 모두 불사르고 떠났다는 고려사절요의 기록을 인용하고 있다.
성곽 안에는 의외로 작은 도랑을 따라 물 흐르는 소리가 청아하다. 채재공이 쓴 ‘송장군묘비명’에 흥미로운 일화가 전한다. 몽골군이 산성을 둘러싸고 물이 떨어지길 기다리는 전술을 쓰자, 송 장군이 손님을 접대한다며 연못의 잉어를 잡아 적에게 보냈다고 한다. 아무리 기다려봐야 소용없다는 전술적 조롱이었다. 실제 발굴조사 결과 성안에서 신라와 조선시대의 집수 시설 각 6기와 2기가 발견됐다. 본래부터 물이 풍부한 곳이었다는 증거다.
온 나라가 오랑캐의 말발굽에 짓밟힌 상황이었으니 송문주 장군의 승리가 더욱 빛날 수밖에 없다. 죽산면 소재지로 들어서는 도로변에도 그의 동상이 커다랗게 세워져 있다.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에도 변이중·황진 장군의 부대가 이곳에서 승리를 거두었다고 하니, 역사적 고비마다 역할을 톡톡히 해낸 성이다.
동문에서부터 성곽을 따라 좌우로 산책로가 이어진다. 짧은 구간에서 옛 성곽의 멋을 만끽하기에는 오른쪽 성곽길이 경제적이다. 푸릇푸릇한 들풀이 깔린 길을 따라 조금만 걸으면 북벽 포루가 있던 자리다. 바깥으로 살짝 돌출된 지형에 포루의 일부가 남아 있고, 그 옆에 오동나무 한 그루가 홀로 서 있다. 성벽 아래로는 일죽면의 들판과 마을, 소규모 공장이 나직하게 펼쳐진다. 어찔하지도 위압적이지도 않은 평온한 가을 풍광이다. 지난 7일 오후, 인근 중소기업에서 근무한다는 남성 3명이 오동나무 그늘 아래에 휴대용 의자를 펴고 앉아 한가로이 커피를 즐기고 있었다. 도시의 직장인들이 누릴 수 없는 점심시간의 호사다.
이곳은 예나 지금이나 서울로 통하는 교통요지다. 성곽길 이정표에 ‘영남길’이라는 팻말이 도드라진다. 조선시대 동래에서 한양까지 이어지는 영남대로의 일부라는 표식이다. 현재 성곽 주변으로는 중부고속도로를 비롯해 진천에서 용인으로 이어지는 17번, 안성에서 장호원으로 연결되는 38번 국도가 교차한다. 사방으로 4차선 도로가 시원하게 뚫려 있다.
성곽길은 북포루에서 서문터로 다시 이어지는데, 이 구간만 산으로 시야가 막혀 있다. 서문터부터는 다시 죽산면과 삼죽면 일대 들판이 시원하게 내려다보인다. 해발 250m 정도로 높지 않은 데 비하면 두루 잘 살필 수 있는 지형이다. 오랜 옛날부터 군사적 요충이었던 이유를 한눈에 짐작할 수 있다.
산성 아래 매산리 입구에는 ‘미륵마을’이라는 표석이 있다. 여러 개의 석탑과 석불이 주변에 흩어져 있는데, 그중에서 마을 한가운데에 위치한 ‘매산리석불입상’은 보호각을 씌워 특별히 대접하고 있다. 고려 초기 양식의 미륵불이다. 미래의 부처를 꿈꾸는 마을이다.
인근에 천주교인들이 경건한 마음으로 찾는 죽산성지가 있다. 충청도와 경상도로 이어지는 길목인 죽산에는 조선시대부터 도호부가 설치돼 있었고, 1866년 병인박해 때 수많은 천주교인이 관아로 끌려와 혹독한 고문 끝에 처형당했다.
박해가 시작된 해부터 무려 70여 년 동안 지역에 천주교 공동체가 없었다는 사실은 당시 공포가 어느 정도였는지 대변한다. 산속으로 도망한 교인을 협박해 딸을 빼앗아간 이야기, 60세의 나이에 교수형을 당한 3대 가족 이야기, 관례를 깨고 부부와 부자를 한날한시에 같은 장소에서 처형한 이야기 등 당시 천주교인들의 참담한 상황이 ‘치명일기’와 ‘증언록’으로 전해진다.
순교자들의 무덤인 만큼 정갈하게 다듬어져 있다. 솟을대문 형식의 성역 문을 통과하면 좌우로 광장이 나오고, 정면 계단 위에 묘소가 조성돼 있다. 가장 중앙에 무명 순교자의 합장묘가 위치하고 좌우로 이름이 확인된 교인들의 무덤이 이어진다. 개중에는 2014년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시복한 복자의 무덤도 있다. 복자는 천주교회가 생전의 덕행이나 순교 사실 등을 검토해 특별히 붙이는 경칭이다. 이들보다 무명 순교자를 배려한 무덤 배치가 돋보인다.
묘지 뒤편에는 ‘십자가의 길’이 조성돼 있고, 성역 바깥은 공원으로 조성돼 있다. 묘역을 한 바퀴 둘러본 후 나무 그늘에서 평온하게 쉴 수 있는 구조다. 공교롭게도 죽산성지가 위치한 곳은 이진(夷陳)터로 불렸다. 몽골군이 죽주산성을 공략하기 위해 진을 친 자리라는 뜻이다. 성지에서 북측 산자락을 보면 죽주산성의 남측 성벽이 아른거린다.
죽산면 소재지에서 멀리 않은 칠현산 자락에 칠장사라는 작은 사찰이 있다. 규모에 비해 역사가 깊고 문화재를 여럿 보유한 절이다. 신라 때 처음 세웠고, 고려 때 혜소 국사(972~1954년)가 중창했다고 전해진다. 조선시대에 선조의 부인 인목대비가 일찍 죽은 아버지와 아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크게 후원했다는 기록도 있다.
사찰 아래의 철당간이 단연 눈길을 끈다. 당간은 불보살의 위엄을 나타내는 기를 내걸기 위해 설치한 짐대다. 칠장사 철당간은 11.5m로 바로 옆의 전봇대가 왜소해 보인다. 다만 자료가 없어 조성 연대와 내력을 알지 못한다. 그외 문화재로 혜소국사비, 대웅전 건물과 괘불탱, 진흙으로 빚은 소조사천왕상 등이 있다.
절이 위치한 칠현산 고개는 진천에서 안성으로 이어지는 길목으로 유난히 도적과 관련된 설화가 많다. 칠현산(七賢山)이란 이름도 절의 물건을 훔친 7명의 도적을 혜소 스님이 바르게 가르쳤다는 설화에서 유래한다. 조선 중기의 의적 임꺽정의 스승이었던 갖바치가 머물렀던 곳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명부전 벽면에는 석가모니의 일대기가 아니라 혜소 스님과 일곱 도적, 임꺽정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것만도 특이한데 한쪽 눈에 안대를 한 궁예도 등장한다. 어린 시절 활을 쏘는 장면, 성인이 돼 참선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증명할 길이 없지만, 궁예가 10살까지 이 절에서 지냈다는 이야기에 근거한 그림이다. 궁예가 처음 의탁했던 기훤의 군사가 죽주산성을 근거지로 삼았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면 정색하고 반박하기도 어렵다.
사찰에서 산자락으로 연결된 조그마한 다리에는 소원을 적은 형형색색의 헝겊이 매달려 있다. 이른바 ‘어사 박문수 합격 다리’다. 박문수(1691~1756)는 25세에 진사 시험에 도전해 3수 끝에 8년 만에 장원급제했다. 과거를 보러 가는 길에 칠장사 나한전에서 기도를 올리고 잠들었는데,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 시제를 알려주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지푸라기도 아쉬운 수험생과 가족이 ‘족집게 도사님’의 은총을 마다할 까닭이 있을까. 조그만 교량이 다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간절한 소원들이 나부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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