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격전지' 된 베트남 에너지 시장...정부 무관심에 한국 기업만 답답

입력
2022.09.15 04:30
수정
2022.09.15 12:01
14면

<56> 베트남 8차 국가전력개발계획 시대
수요·질 모두 갖춘 베트남 시장 경쟁 심화
석탄·태양광·수력 대신 LNG 신규 시장 주목
"기업 '개인기'론 한계, 韓정부 지원 필요해"

편집자주

국내 일간지 최초로 2017년 베트남 상주 특파원을 파견한 <한국일보>가 2020년 2월 부임한 2기 특파원을 통해 두 번째 인사(짜오)를 건넵니다. 베트남 사회 전반을 폭넓게 소개한 3년의 성과를 바탕으로 급변하는 베트남의 오늘을 격주 목요일마다 전달합니다.


베트남 남부 동나이성에 건설 중인 년짝 가스복합화력발전소 3·4호기의 모습. 베트남석유가스공사 홈페이지 캡처

베트남 남부 동나이성에 건설 중인 년짝 가스복합화력발전소 3·4호기의 모습. 베트남석유가스공사 홈페이지 캡처

탈(脫)중국 글로벌 기업들을 무섭게 빨아들이고 있는 베트남이 세계 에너지 시장에서도 '블루칩'으로 떠오르고 있다. 신발부터 휴대폰과 자동차까지 베트남은 현재 한국과 미국·일본·유럽 거대기업들의 수많은 생산라인이 쉼 없이 지어지고 있는 유일한 나라다. 당연히 이들 공장을 돌리기 위한 전력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고 있고, 새로운 시장을 본 에너지 '공룡' 기업들은 자석에 끌리듯 베트남으로 향하고 있다.

탄탄한 수요를 보장하기 때문에 베트남 전력시장의 '질' 또한 우수하다. 이웃 필리핀의 경우 상반기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7.4%로 비교적 높았지만 전력시장 성장률은 4%에 그쳤다. 대부분 저기술 내수용 소비재만 생산하다 보니 전력 설비가 저출력·비첨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베트남의 신규 공장은 한 번 지어지면 쉽게 이전하기 어려운 고출력·첨단설비를 대부분 갖추고 있다. 필리핀과 달리 상반기 베트남의 전력시장 성장률(11%)이 GDP 성장률(7.7%)을 넘어선 건 당연한 결과다.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에너지 기업들이 베트남에 진출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에너지 업계 1위 프랑스 토탈(Total)을 필두로, 미국의 엑손모빌(ExxonMobil), 일본의 마루베니 등 각국의 대표 기업들이 약속한 듯 모두 베트남에 모였다. 한국도 한국전력·한화에너지·삼성물산 등 25개 기업들이 출사표를 던졌다. 누가 이겨도 이상할 것 없는 거대기업들의 총성 없는 전쟁터. 그곳이 바로 지금의 베트남이다.

8차 PDP 발표 임박… 韓 진출 기업 전략 변화 '잰걸음'

지난달 28일 응우옌 쑤언 푹(오른쪽) 베트남 국가주석이 타잉화성에서 열린 응이손2 화력발전소 준공식 현장에서 도쫑흥 타잉화성 당서기장과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타잉화=정재호 특파원

지난달 28일 응우옌 쑤언 푹(오른쪽) 베트남 국가주석이 타잉화성에서 열린 응이손2 화력발전소 준공식 현장에서 도쫑흥 타잉화성 당서기장과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타잉화=정재호 특파원

우수한 경쟁자가 한 시장에 몰려들다 보니 세계 어딜 가도 '슈퍼 갑(甲)'인 글로벌 에너지 기업들도 베트남에선 을(乙)에 불과하다. 사회주의 국가인 베트남의 에너지 시장은 철저히 공산당의 '국가전력개발계획(PDP)'이라는 밑그림에 의해 운영된다. 에너지를 '안보의 핵심'으로 보는 국가주의적 사고가 베트남에선 여전히 강력하게 작용한다는 뜻이다. 실제로 2016년 발표·시행된 7차 PDP는 '성장 최우선'에서 '원자력 도입유예·태양광 장려'로 정책을 급선회, 현지 시장에 큰 혼란을 준 바 있다.

14일 베트남 산업무역부 등에 따르면, 최소 5년 이상 베트남 에너지 시장의 방향성을 결정할 8차 PDP는 올해 내 발표가 유력하다. 당초 2021년 하반기에 발표됐어야 할 8차 PDP는 같은 해 2월 공산당대회로 권력 서열이 바뀌면서 이날까지 최종안을 확정 짓지 못한 상태다. 다만 반복된 개정 과정에서도 빠지지 않은 8차 PDP의 주요 골자는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났다.

수산중공업이 건설한 베트남 남부 바리아-붕따우성 태양광 발전소의 모습. 수산중공업 제공

수산중공업이 건설한 베트남 남부 바리아-붕따우성 태양광 발전소의 모습. 수산중공업 제공

8차 PDP 내용 중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지난 30년 동안 베트남 전력산업을 이끌어 왔던 석탄화력의 퇴장이다. 베트남 정부는 8차 PDP를 기점으로, 현재 진행 중인 석탄발전소 건설사업만 남기고 2030년 이후에는 추가 사업을 승인하지 않기로 했다. 더불어 이미 지어진 석탄화력발전소에 대한 '환경오염 방지' 기준도 최대치로 높일 계획이다.

포화된 태양광 역시 신규 사업 허가가 나지 않을 공산이 크다. 발전보조금(FIT) 지급 등을 통해 태양광을 적극 장려한 7차 PDP 시행 결과, 남부에선 태양광 발전 전력이 남아돌고 있다. 2020년 베트남 전체 전력량의 24%를 차지했던 태양광이 5년의 전성기를 끝으로 수명을 다한 것이다.

수력 발전 역시 내리막길이 예상된다. 건기 때 발전량이 급격히 떨어지는 한계를 가진 수력 발전은 메콩강 유량 감소라는 직격탄을 맞은 상태다. 메콩강 하류에 위치한 베트남은 중국이 상류에 지은 11개의 대형 댐 때문에 최근 극심한 가뭄에 시달리고 있다.

지난달 28일 준공된 베트남 타잉화성 응이손2 화력발전소의 모습. 발전소를 건설한 한국전력은 발전소 굴뚝에 최신 배기가스 저감 장치를 설치했다. 타잉화=정재호 특파원

지난달 28일 준공된 베트남 타잉화성 응이손2 화력발전소의 모습. 발전소를 건설한 한국전력은 발전소 굴뚝에 최신 배기가스 저감 장치를 설치했다. 타잉화=정재호 특파원

지난 5년 동안 석탄 및 태양광 발전사업에서 두각을 나타낸 한국 기업들은 서둘러 대응에 나섰다. 먼저 한국전력은 일본과 합작 건설한 타잉화성(省) 응이손2 화력발전소 자체 사용 전기를 태양광 시스템으로 충당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이어 베트남 마지막 석탄화력 사업이 될 중부 하띤성의 붕앙2 발전소 굴뚝 배기가스를 줄일 수 있는 최신 매연 저감 장치도 설치할 예정이다.

한국 태양광 기업들도 발 빠르게 움직였다. 지난 2019년 6월 남부 바리아-붕따우성에 60헥타르(ha) 규모의 태양광 발전소를 건설한 수산중공업은 최근 베트남 에너지기업들과 인수합병(M&A)을 진행, 신규 시장 진출을 모색하고 있다. 권오준 수산중공업 베트남 법인장은 "평균 발전시간 확보 등으로 연간 11만 메가와트(MW)를 생산·판매하는 등 충분한 이득을 거두고 있다"면서도 "앞으로는 발전 가능성이 높은 복합발전소 경상정비 시장 진출에 집중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베트남 LNG시장을 석권하라… 韓·美·日 경쟁 본격화

베트남 남부 바리아-붕따우성에 위치한 베트남 첫 LNG 터미널사업인 '티바이 LNG 프로젝트' 현장 모습. 해당 사업은 삼성물산이 수주해 건설 중이다. 삼성물산 제공

베트남 남부 바리아-붕따우성에 위치한 베트남 첫 LNG 터미널사업인 '티바이 LNG 프로젝트' 현장 모습. 해당 사업은 삼성물산이 수주해 건설 중이다. 삼성물산 제공

석탄과 수력이 빠져나가는 자리에는 액화천연가스(LNG)가 채워진다. 8차 PDP는 2030년까지 LNG 발전량을 18~26기가와트(GW) 더 늘리는 방향으로 설정되고 있다. 2020년 베트남 전체 발전량이 69.4GW인 점을 감안하면, 10년 안에 현재 전력량의 최대 3분의 1에 가까운 발전량을 LNG로 대체한다는 뜻이다.

방향 변화를 감지한 글로벌 에너지 기업들은 서둘러 시장 선점에 나섰다. 엑손모빌은 일본전력사인 제라(JERA)와 함께 하이퐁시와 총 투자액 51억 달러 규모의 'LNG발전 프로젝트 협력' 3자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프랑스 전력공사(EDF)도 일본 규슈전력 등과 합작해 빈투언성에 2.3GW 규모의 손미1 발전소 프로젝트 투자에 나섰다. 이외에도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E)과 델타 컨소시엄, 일본 미쓰비시중공업 등도 LNG발전소 신규 투자를 진행 중이다.

한국 에너지 기업들도 물러서지 않고 있다. 바리아-붕따우성에 위치한 베트남 첫 LNG 터미널사업인 '티바이 LNG 프로젝트'를 수주한 삼성물산은 내년 1월 LNG 터미널을 준공한 뒤, 인근 동나이성의 년짝 가스복합화력 발전소 3·4호기도 추가로 건설한다. 한화에너지는 지난해 12월 남부발전·한국가스공사와 함께 중부 지역의 첫 LNG 복합발전소인 '하이랑 프로젝트' 사업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美·日 전방위 지원 사격… 뒷짐 진 韓, 전략 변화 필요

지난달 28일 레반탄(위쪽) 베트남 부총리가 타잉화성에서 열린 응이손2 화력발전소 준공식 현장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그의 앞 귀빈석에는 응우옌 쑤언 푹 국가주석이 앉아 있다. 타잉화=정재호 특파원

지난달 28일 레반탄(위쪽) 베트남 부총리가 타잉화성에서 열린 응이손2 화력발전소 준공식 현장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그의 앞 귀빈석에는 응우옌 쑤언 푹 국가주석이 앉아 있다. 타잉화=정재호 특파원

한국 기업이 베트남 LNG시장에서 선전하고 있지만 미래는 그리 밝지 않다. 경쟁국들이 국가 차원에서 자국 기업의 에너지 사업을 지원하는 것과 달리, 한국 중앙정부는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 2년 동안 베트남을 방문한 미국 정부 고위 관계자들은 한결같이 자국 기업들의 베트남 LNG사업 참여 기회 확대를 주창하며 중앙정부를 압박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역시 지난해 11월 팜민찐 베트남 총리를 취임 후 첫 해외 정부수장으로 공식 초청, 자국 기업들의 LNG사업 편의를 각별히 당부한 바 있다.

반면 한국은 한덕수 국무총리가 지난 7월 찐 총리와 전화 통화에서 LNG사업을 짧게 언급한 것이 전부다. 그나마도 한 총리의 모호한 발언 때문에, 이후 한국 기업들은 다시 관련 부처를 찾아 배경을 설명해야 했다.

베트남 진출 A에너지기업 법인장은 "가격 경쟁력이 충분한 한국 기업은 오늘도 인적 네트워크에 의존한 '개인기'로만 버티고 있다"며 "그나마 주베트남 한국대사관이 적극적으로 현장 지원을 하고 있지만, 지금처럼 우리 중앙정부의 무관심이 이어진다면 베트남 에너지 시장이라는 큰 이익을 타국에 손 놓고 뺏길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푸념했다.

속 타는 한국 기업과 달리 베트남은 느긋한 표정이다. 레반탄 부총리는 지난달 28일 타잉화성에서 열린 응이손2 화력발전소 준공식 현장에서 "LNG 등 베트남 에너지 사업을 다각화하고 경쟁적이며 투명한 체계를 구축할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어떤 나라가 됐건 자국의 실리를 보장하는 쪽에 사업권을 넘기겠다는 취지다.

베트남 진출 한국 기업 수는 올해를 기점으로 9,000개를 넘어섰다. 현지 에너지 사업권 확보는 신규 국익 창출인 동시에 한국 기업들의 경영 안정에도 중요한 요소임은 자명하다. 더 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없음을, 더 늦기 전에 우리 정부는 인지해야 한다.

베트남 남부 꾸이년에 위치한 풍력발전소의 모습. 베트남은 LNG사업과 달리 첨단 기술이 필요 없는 풍력 발전은 자국 기업들에게 운영 및 사업권을 몰아줄 계획이다. 꾸이년=정재호 특파원

베트남 남부 꾸이년에 위치한 풍력발전소의 모습. 베트남은 LNG사업과 달리 첨단 기술이 필요 없는 풍력 발전은 자국 기업들에게 운영 및 사업권을 몰아줄 계획이다. 꾸이년=정재호 특파원


타잉화·꾸이년·호찌민·하노이= 정재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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