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우리는 중남미에 대해 무엇을 상상하는가. 빈곤, 마약, 폭력, 열정, 체게바라? 인구 6억2,500만. 다양한 언어와 인종과 문화가 33개 이상의 나라에서 각자 모습으로 공존하는 중남미의 진짜 모습을 민원정 칠레 가톨릭대 교수가 전해준다.
칠레 경제민주화 상징, 헌법개정 62% 반대로 5일 좌초
국민투표 좌절로 정파간 개헌 관련한 새로운 논의 필요
가난에 지쳐 개혁보다 안정 선택한 칠레 민심에도 주목
2019년 10월 지하철 요금 50원 인상을 계기로 칠레 곳곳에서 대규모 시위가 발발했다. 당시 우파 보수 정부는 폭력적 시위 사태를 해결할 목적으로 아우구스토 피노체트(Augusto Pinochet) 군사 독재(1973~1990) 아래서 작성된 1980년 헌법을 대체할 새 헌법 초안 작성 협상을 시작했다. 2020년 1차 국민투표에서 80%에 가까운 국민이 새 헌법 작성과 이를 위해 선출된 제헌의회에 찬성했다. 2021년 12월, 학생운동가 출신 35세 극좌파 보리치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칠레 민주주의의 과도기는 막바지에 다다르는 듯 보였다. 그는 기존의 중도 좌우, 그 어느 정당에도 속하지 않은 새로운 인물이었다. 독재 청산을 약속했고 신자유주의를 몰아내리라 선언했다. 1년여간의 작업 끝에 평등에 기반한 새 헌법 초안이 선을 보였다. 그러나 지난 9월 5일, 약 62%의 칠레 국민은 새로운 진보적 헌법 초안에 반대표를 던졌다.
2019년 시위 이후 야기된 정치·사회적 위기를 민주적으로 해결하려는 시도는 실패한 듯하다. 헌법 새로 쓰기는 겉보기에는 민주적이고 성공적인 과정이었으나, 지난 3년간 복잡하고 다양한 요인이 실타래처럼 꼬였고 사람들의 동의는 사라졌다. 우파는 가짜뉴스와 허위정보를 유포해 공포와 불안을 조장했다. 제헌의회는 지나칠 정도로 부당한 요구와 일부 의원의 부적절한 행동으로 국민의 신뢰를 잃었다. 인플레이션은 연평균 13%로 수십 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더욱이 코로나19 여파로 정부의 개혁 의지는 미처 발휘될 기회조차 잡지 못했다.
진보진영은 게을렀다. 내부 분열로 뒤늦게 '승인' 운동에 합류했고 '거부' 캠페인에 대응하기 위한 통합된 자체 내러티브를 제공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 신자유주의 타파, 환경, 성평등, 의료보험 개혁, 원주민 지역 자치 인정을 골자로 하는 헌법 초안은 세계에서 가장 진보적인 헌법 중 하나였다. 지난 30년간 쌓인 사회적 욕구에 해결책을 제시하려 했으나 칠레 국민의 대다수는 충분치 않거나 혹은 지나치다고 판단했다. 모두가 평등한 다단계 입헌주의는 오히려 개인 권리 침해로, 원주민 지역의 권리 보호는 국가 분열로 이해되었다. 우파는 이번 투표 결과로 반사 이득을 보고 있지만, 이는 우파 정권에 대한 지지로 간주할 수 없다. 사람들은 양 캠페인의 불평등한 재정 비율(70-30%)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초안이 거부됨에 따라 칠레 정부는 정치적 진영 간에 새로운 헌법 절차를 위한 로드맵을 협상해야 할 도전에 직면했다. 당분간은 구헌법이 유효하지만, 구질서로 돌아가기에는 상황이 그리 단순하지 않다. 처음부터 다시 쓰기, 이번에 마련된 초안 수정, 구헌법 대폭 개정, 그 무엇도 순탄치 않아 보인다. 미국 웨이크 포레스트대학의 피터 시아벨리스(Peter Siavelis) 교수는 지난 5일 투표는 칠레 개헌 과정의 끝이 아닌 시작이며, 어떤 결과가 나오든 칠레의 미래는 불확실하다고 말했다.
1973년 9월 11일 군대가 대통령궁을 점거하고 당시 아옌데 대통령은 저항 끝에 자결했다. 이후 칠레는 신자유주의의 실험장이자 모범생이었다. 아옌대 전 대통령과 비슷한 안경을 낀 보리치 대통령은 "의회와 시민사회와 함께 새로운 헌법 여정을 만드는 데 온 힘을 기울이겠노라" 국민 앞에 약속했다.
이번 투표는 부분적으로는 집권 후 내내 부실한 행정력을 선보인 새 정부에 대한 중간 평가이기도 했다. 새 정부는 새 헌법과 불가피하게 동일시되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독재정권의 잔재를 청산했다!"던 그의 당선 외침은 거친 시위, 치안 불안, 불확실성, 싸움, 그리고 가난에 지친 국민 앞에 무색해졌다. 정치인도 사회운동가도 아닌 대부분의 칠레 국민은 개혁보다 안정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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