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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들섬 오리들이 감전사하는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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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서울올림픽(1988)을 역대 올림픽 개막식 중 최악으로 꼽았다. 성화대 점화 장면에서 비둘기가 타죽는 ‘화형식’을 보여줘서다. 애국심 고양의 분위기가 눈을 가렸는지, 아니면 어려서였는지, TV에서 지겹도록 봤던 점화장면에서 난 비둘기를 눈여겨본 적이 없다. 국내 언론이 ‘비둘기 사망’의 진실을 알려줄 리도 없었다. 그런 한국의(그리고 나의) 오랜 무지와 형편없음은 외부의 시선, 즉 외신의 보도를 마주하고서야 일깨워졌다.
지난주 그 ‘비둘기 화형식’을 떠오르게 하는 뉴스가 있었다. 겨울철 수십만 마리의 가창오리 군무를 볼 수 있는 충남 당진 삽교호 내부의 소들섬. 한국전력공사가 그 곳에 고압송전탑을 세우려 시멘트 공사를 강행하고 있다는 보도(오마이뉴스)였다. 삽교호엔 큰기러기가 최대 3,119마리, 큰고니도 523마리 관찰됐고, 천연기념물 199호 황새 무리와 저어새, 흰꼬리수리도 산다.
한전이 굳이 이곳에 송전탑을 세우려는 이유는 지하화(지중화)할 경우, 비용이 1,000억 원가량 더 들기 때문이란다. 주민들의 노력으로 올해 1월 이 일대가 야생생물보호구역으로 지정됐으나, 한전은 공사를 밀어붙이고 있다. 일부 언론은 “한전 처지에선 진작 보호구역인 걸 알았다면 공사 전반에 대해 미리 면밀하게 검토했을 텐데 뒤늦게 통보하고 공사 계획을 새로 짜라니 난감”이라며 한전을 두둔하고 있다. 그러나 기만은 한전이 먼저 한 것으로 보인다. “한전의 환경영향평가서(2012년 9월)에는 가창오리가 삽교호의 솟벌섬과 방조제에 머물고, 소들섬에는 가창오리가 없다고 돼 있다”(오마이뉴스)고 한다. 소들섬을 새까맣게 채운 가창오리들의 사진이 즐비한데 말이다.
이 사건을 전혀 몰랐던 것에 반성하며 기사들을 찾아봤다. 당진 지역 신문에선 핫이슈였다. 지난달 31일 주민들이 금강유역환경청을 찾아, 한전을 고발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빈손으로 돌아왔다. 심각한 얼굴로 모인 나이 지긋한 주민들의 사진을 보고 있자니 부끄러웠다. 서울에서 산다는 것은 비수도권에서 생산하는 전기를 끌어 쓰면서, 송전탑으로 발전소로 ‘지방’을 착취하는 일에 동참하는 것이다. 서울의 언론사에서 일한다는 것은 서울과 정치권 중심의 문제들을 부각하고, 비수도권의 문제들은 거의 모르거나 축소하는 ‘우물 안 상전’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지난해 매립지·소각장 등이 들어서며 터전과 건강, 나아가 생명을 잃은 각지의 사정을 보도(‘국가가 버린 주민들’)하면서, “서울에서 벌어졌어도 이렇게 해결되지 않고 방치됐을까”라는 생각을 했었다.
부디 정승일 한전 사장, 한화진 환경부 장관, 이창양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나아가 윤석열 대통령은 소들섬 문제에 관심을 갖길 바란다. 소들섬을 지킬 1,000억 원. 멀쩡한 청와대를 버리고 대통령 집무실을 용산으로 이전하는 데 들어간 비용(현재까지 800억 원 이상)과 비슷하다.
환경 문제는 나라의 품격, 즉 국격의 척도이다. 한전의 적자가 심하니 새들의 낙원을 파괴하건 말건 송전탑 공사를 밀어붙이겠다면, 국격은 딱 1988년 올림픽 시절에 묶여 있다는 뜻이다. 이번에도 소들섬 오리들이 송전탑에서 감전사하는 모습을 타임지, 혹은 CNN이나 BBC가 보도해야 심각성을 알아차릴 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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