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형 "대법관들 고민이 재판 과정에 드러나야 사법 신뢰 커져"

입력
2022.09.16 04:30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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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형 전 대법관 인터뷰
상고심 제도 개선 필요성 강조
"어떤 모습의 대법원 원하는지
깊이 토론하고 합의 도출할 때"
판결문은 많이, 신속히 공개해야
"법관, 진보·보수 도식적 분류 부적절"

김재형 전 대법관이 8일 서울 서초동 자택 인근에서 산책하고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김재형 전 대법관이 8일 서울 서초동 자택 인근에서 산책하고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대법관의 하루는 고단하다. 대법관 13명(법원행정처장 제외)은 1인당 연간 4,000여건을 처리한다. 대법관을 두고 "취임날만 즐겁고 매일매일 고행"이라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김재형 전 대법관 역시 6년 임기를 마친 지난 2일 퇴임식에서 "취임식 반나절만 즐겁고 그 이후로는 괴로운 것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저는 재판하고 판결문을 쓰는 데서 즐거움과 보람을 찾고자 했다"는 말을 남겼다.

한국일보는 지난 8일 서울 서초동 자택 인근에서 김 전 대법관을 만나 퇴임사의 의미를 되짚어 보고, 법원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들었다. 그는 "법을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하느냐는 사법부의 본질이며, 법관의 태도를 결정하는 잣대"라고 말했다. "법관을 진보 혹은 보수로 도식화한 틀에 가두려 해선 안 된다"는 말도 남겼다.

-'정치 영역이 입법으로 풀 문제를 사법부가 해결해서도 안 되고 그렇게 할 수도 없다'는 퇴임사 발언이 화제가 됐다.

"과거 판결문(올해 4월 군 형법상 강제추행 전원합의체 사건 보충의견)에 담은 표현을 그대로 따왔다. 퇴임사 중 판결문을 인용한 유일한 문장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에선 법률 문구에 따라 해석할지 법의 목적과 헌법을 고려해 유연하게 해석할지가 중요한 고민의 지점이었다. 여기엔 사회 변화나 시대 변화를 반영할지도 포함된다. 6년을 돌아보며 쓴 퇴임사일 뿐, 특정 사건을 염두에 둔 건 아니다."

-정당 내부 문제 등 정치적 갈등이 법원으로 오는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나.

"어려운 질문이다. '법원은 재판을 거부하지 못한다'는 격언이 있다. 사건이 오면 법원은 판단해야만 한다는 얘기다. '정치 영역에서 문제된 사건 판단에는 여러 해석이 따를 수밖에 없다'는 정도로 답변하고 싶다."

-강제노역과 관련한 일본 미쓰비시의 특허권 강제매각 재항고 사건 주심이었다. 퇴임 전에 마무리할 것이란 예상이 있었는데 결국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제가 판단하지 않은 사건이어서 답변드리기 곤란하다. 다만, 주심 대법관이라고 혼자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재항고 사건에 대해 판단하지 않은 것도 대법관들 합의에 따른 결론이다."

-6년 동안 수많은 판결을 내렸다. 가장 기억에 남는 판결을 꼽는다면.

"2018년 '양심적 병역거부' 사건 전원합의체 무죄 판결을 꼽겠다. 2016년 대법관이 된 직후 연구관에게 보고서 작성을 주문했다. 1989년 대학원 석사 과정 때 헌법재판소가 헌법불합치 결정을 해야 한다는 취지의 양심적 병역거부 관련 과제물을 써냈다.(과제물은 2002년 출간된 서울대 공익인권법센터의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책에 실려 있다. 그는 "양심의 자유 실현을 위해 양심적 병역거부권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만큼 오랫동안 고민해 온 주제였다. 유엔이나 많은 인권단체에서 양심적 병역거부를 허용해야 한다고 얘기했는데 판결을 통해 해결됐다. 당시 논란이 많았지만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바람직하다고 보는 듯하다."

김 전 대법관은 전원합의체 주심으로서 '정당한 사유 없이 입영통지에 불응하면 3년 이하 처벌'을 규정한 병역법 88조 1항의 '정당한 사유'에 양심적 병역거부도 해당한다며 14년 만에 대법원 판례를 변경했다. 그는 "앞서 (무죄를 선고한) 하급심 판결들이 있어 대법원도 판결할 힘이 생겼을 수 있다"고 말했다.

"법정서 고개 숙여 울던 성희롱 피해자 생생히 기억"

김 전 대법관은 소부(대법관 4인 구성) 선고 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사건을 꼽았다. '르노삼성자동차 성희롱' 사건이었다. 대법원은 성희롱 피해자와 그를 도운 동료에게 근무시간 위반 등을 이유로 인사조치한 회사에 대해 원심을 파기하고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김 전 대법관은 2017년 12월 선고 당시 법정 광경을 생생히 떠올렸다.

"여러 선고가 있어 법정이 북적였는데 맨 앞줄에 6명이 보였다. (속으로) '이들 중 한 명이 피해자겠구나' 생각했다. 2016년 그분의 탄원서에는 '대법원 판결이 안 나면 좋겠다'는 대목이 있었다. '(하급심에서 패소한) 판결이 확정되면 또 얼마나 시달릴까' 하는 걱정이었다. 주심인 제가 원심 판결을 파기하자 6명 중 가운데 여성이 고개를 푹 숙이면서 울었다. '저분이 피해자구나' 했다. 그는 부축을 받고 법정을 나갔다. (판결 전날) 밤늦게까지 판결문을 9차례 고쳤다.

김재형 전 대법관이 8일 서울 서초동 자택 인근에서 한국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김재형 전 대법관이 8일 서울 서초동 자택 인근에서 한국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대법관을 진보나 보수로 분류해 틀에 가두려는 경향이 있다. 퇴임사에서 "바람직하지 않다"고 꼬집었다.

"법관을 출신과 성별, 연구회 활동 등에 따라 도식적으로 진보냐 보수냐로 나누는 기준이 적절한지 생각해 볼 때가 됐다. (도식적인 분류 대신) 법관의 판결들에 대해 일정한 기준을 갖고 법관을 평가하는 게 바람직하다. 자기 진영의 이해관계에 따라 법관을 비난하려고 출신 등의 잣대를 대는 것은 문제다."

-사법부 신뢰가 저하되고 있다는 지적도 계속 나온다. 대법원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나.

"전원합의체와 공개변론이 활발해지도록 개선돼야 한다. 공개변론을 많이 하면 사법 신뢰를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다. 국민들이 판결이 어떻게 나오는지 제대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대법관이 무슨 고민을 하는지 공개변론을 통해 드러내면 결국 재판의 투명성도 높아진다. 3월에는 소부 사건에 공개변론을 열기도 했다."

-상고심 개선 방향과 판결문 공개에 대한 생각을 듣고 싶다.

"대법원 사건이 너무 많다. 본안 사건만 연간 4만 건이 넘는다. 개혁은 방향성이 중요한데, 우리 사회가 대법원이 어떤 모습이길 원하는지 깊이 생각하고 토론해 합의를 도출할 때가 됐다. 법원 내부나 학계에서 이상적 모델을 제시해도 국민이 원치 않으면 할 수 없다. 공감대를 이뤄 좋은 방안이 나오길 기대한다. 판결문 공개는 많이 할수록, 신속할수록 좋다. 인격권 침해 우려로 인한 익명화 비용이나 시간이 필요하지만, 공개로 인한 이익이 훨씬 크다. 국민이 손쉽게 볼 수 있는 방향으로 가는 게 맞다."

김재형 전 대법관은

김재형(57·사법연수원 18기) 전 대법관은 민법 최고 권위자로 꼽힌다. 대법관 재임 시절엔 '양심적 병역거부'와 '합의에 따른 동성 군인 성관계' 처벌 불가 판결을 내리는 등 사회 변화를 이끄는 판례를 남겼다.
김 전 대법관은 1986년 제28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1992년부터 판사 생활을 시작했지만, 양창수 전 대법관의 제의로 3년 만에 법복을 벗고 서울대 법대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김 전 대법관은 서울대에서 20년 넘게 민법 강의를 도맡으며 후학 양성과 연구에 매진했다. 교수 시절 민법론과 민법총칙 등 다양한 민사법 전공서적과 논문을 저술하고, 민사재판 실무상 난제 해결을 위한 이론적 토대를 마련해 '민법 대가'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는 2016년 이인복 전 대법관 후임으로 서초동 생활을 시작했다. 양 전 대법관에 이어 학자 출신으론 두 번째 대법관이었다. 대법원은 김 전 대법관에 대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민법 권위자이면서 학자로서는 흔치 않게 실무경력도 갖춘 법조인"이라며 "한국 법학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밝혔다.
김 전 대법관은 재임 기간 굵직한 판결을 여럿 남겼다. 전원합의체 주심으로 2015년 대법원 판례를 깨고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긴급조치 9호'로 수사와 재판을 받은 피해자들에 대한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또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군입대를 하지 않는 '양심적 병역거부'와 부대 밖 사적 공간에서 합의에 따라 이뤄진 동성 군인 성관계에 무죄 판결을 내렸다.
민법 권위자로서의 판결도 돋보였다. 토지 공유자 가운데 일부가 다른 공유자와 상의 없이 공유 토지를 무단으로 사용하더라도 토지 인도 청구는 할 수 없다는 판결이 대표적이다. 김 전 대법관은 삼성전자 LCD공장 노동자의 다발성 경화증을 산업재해로 인정하기도 했다.
김 전 대법관은 퇴임식에서 정치권에 쓴소리를 남겼다. 그는 "입법이 제때 이뤄지지 않아 국민들이 권리 구제를 받지 못하고, 불필요한 소송으로 이어져 사회적 낭비를 초래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대법관을 보수 혹은 진보로 분류해 어느 한쪽에 가둬 두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도 했다.
김 전 대법관은 상고제도 개혁도 강조했다. 그는 "대법원이 신속하고 공정하게 사건을 처리하면서도 전원합의체와 공개 변론을 활성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려면 상고심 제도의 개선이 선행돼야 한다"고 밝혔다.

손현성 기자
문재연 기자
박준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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