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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은 기쁨조가 아닙니다"... 부활하는 '사내 장기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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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급쟁이의 삶은 그저 '존버'만이 답일까요? 애환을 털어놓을 곳도, 뾰족한 해결책도 없는 막막함을 <한국일보>가 함께 위로해 드립니다. '그래도 출근'은 어쩌면 나와 똑같은 문제를 겪고 있는 노동자에게 건네는 전문가들의 조언을 담습니다.
#1. 건설업체에 갓 입사한 이모(28)씨는 올해 7월 열린 회사 워크숍만 떠올리면 치가 떨린다. 워크숍 첫날 직무 교육 등의 프로그램이 진행되던 와중에 임원들 사이에서 "신입사원들은 누가 잘 노는지 아직 못 봤네"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임원 말 한마디에 예정에 없던 장기자랑 무대가 일사천리로 마련됐다. 이씨는 전 직원 300여 명을 앞에 두고 동기들과 함께 춤을 추고, 무반주로 트로트 노래까지 불러야 했다. 그는 "누가 콕 집어 강요한 건 아니지만 신입 직원은 무대에 오르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였다"며 "윗사람 앞에서 재롱을 떠는 것 같아 정말 수치스러웠다"고 토로했다.
#2. 경기 수원시의 한 병원에서 근무 중인 박모(30)씨도 6월 비슷한 경험을 했다. 병원 경영진은 느닷없이 "직원 단합이 중요하다"며 사내 노래대회 개최를 공지했다. 박씨는 처음에는 '노래 잘 부르는 직원들이 나가겠구나'라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노래를 부르지 않는 직원에게는 20만 원의 벌금을 물리겠다는 '윗선'의 방침이 전달되면서 분위기는 이상하게 흘러갔다. 박씨도 결국 전 직원 앞에서 노래를 불렀고, 노래 대회는 '한 가족이라 행복합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현수막을 들고 단체사진을 찍은 뒤에야 끝났다. 그는 "노래대회를 한다고 단합이 되느냐. 직원은 회사의 기쁨조가 아니다"라고 하소연했다.
최근 신입사원 교육이나 워크숍 등 사내 행사에서 이뤄지는 장기자랑에 대한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직장인이 늘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과 직장 내 갑질을 비판하는 여론이 맞물려 빠르게 사라지던 사내 장기자랑 문화가 다시 살아날 조짐이 완연한 것이다. 반강제적으로 직원을 동원하는 방식의 장기자랑은 엄연한 '직장 내 괴롭힘'이다.
사실 최근 몇 년 사이 사내 장기자랑은 사라지는 추세였다. 2017년 재단 체육대회에서 신입 간호사들에게 짧은 바지나 배꼽이 훤히 노출되는 옷 등을 입고 선정적 춤을 추도록 강요한 '한림대 성심병원 간호사 장기자랑' 사건이 단초가 됐다. 이후 비슷한 내용의 폭로가 잇따랐고, 본인의 의사에 반하는 장기자랑은 직장 내 갑질에 해당한다는 자성 여론이 형성됐다. 여기에 코로나19 여파로 신입사원 연수처럼 많은 직원이 한데 모이는 주요 행사가 대거 취소되면서 장기자랑은 구시대 '유물' 취급을 받았다.
실제 13일 한국일보가 삼성, 현대자동차, SK, LG 등 4대 그룹에 문의해보니 사내 공식 행사에서 장기자랑을 하는 기업은 한 곳도 없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개인주의와 합리성을 중시하는 20, 30대 직원들이 장기자랑에 대한 반감이 커 신입사원 연수도 직무교육 중심으로 재편했다"고 설명했다. 시민단체 직장갑질119가 6월 직장인 1,000명을 상대로 실시한 조사에서도 장기자랑을 대하는 20, 30대 민감성 지수는 각각 84.9, 82.0으로 40대(79.1), 50대(73.7)에 비해 높은 건 물론, 전(全) 세대 를 통틀어 유일하게 80을 넘었다. 또 다른 대기업 관계자는 "요즘 사원들은 불합리한 부분이 있으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즉각 폭로한다. 장기자랑 같은 악습은 없애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굳건할 것 같던 사회적 공감대는 4월부터 사회적 거리두기가 해제되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많은 직장인들은 장기자랑이 조금씩 부활하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7월 SNS에서 중견 A그룹이 코로나19 사태 후 3년 만에 실시하는 합창대회가 논란이 된 적이 있다. A그룹에 다니는 한 직장인이 ①막내급 직원은 합창에 필참하고 ②평일ㆍ주말 모두 연습하며 ③합창을 하지 않는 직원도 응원에 동원된다며, "공산당 기쁨조에 차출되는 느낌"이라고 폭로해 많은 공감을 받았다.
한 대기업 건설회사에 다니는 대리급 직원 장모(30)씨는 "코로나19로 몇 년 뜸했는데 회사 야유회에서 장기자랑 행사를 한다고 한다"면서 "나는 연차가 낮아 100% 차출될 텐데, 댄스 학원이라도 다녀야 하나 고민 중"이라고 한숨을 쉬었다. 중견 주방가전업체에서 근무하는 신입사원 조모(28)씨 역시 "우연히 4년 전 회사 워크숍 관련 자료를 보다가 당시 신입사원 장기자랑 코너가 있었다는 걸 알게 돼 깜짝 놀랐다"며 "사실상 폐지된 장기자랑을 최근 임원들이 다시 하자고 얘기하고 있어 너무 불안하다"고 말했다.
노사 전문가들은 참석을 강제하고, 점심시간 등 휴게시간이나 휴일에 연습을 시키는 이른바 '한국형 장기자랑 문화'는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된다고 지적한다.
근로기준법은 직장 내 괴롭힘을 ①직장에서 지위 또는 관계 등 우위를 이용해 ②업무상 적정범위를 넘어 ③신체적ㆍ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로 규정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수원 한 병원의 박모씨 사례처럼 경영진이 불참자에게 20만 원을 걷는다고 공지하는 등 노래대회 참여를 강요하면 업무상 적정범위를 넘어서는 '괴롭힘'으로 인정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진단이다.
윤지영 직장갑질119 변호사는 "사내 장기자랑을 모두 직장 내 괴롭힘으로 단정짓기는 어렵다"면서도 "근무 외 시간에 연습을 시키는 등 장기자랑 준비 과정이 괴롭힘 형태를 띠고 있고, 참석 및 준비를 강제하는 사람이 특정될 경우 직장 내 괴롭힘으로 신고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장종수 직장갑질119 노무사는 "현실적으로 개인이 사측에 직접 장기자랑 거부 의사를 표하기 어려운 만큼, 사내에 노사가 이런 사안을 논의할 수 있는 소통 채널을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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