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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막히는 엄숙주의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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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잡지가 청와대에서 화보를 찍었다가 뭇매를 맞았다. “역사성ㆍ상징성ㆍ정체성을 해쳤다”는 죄목이다. 그 여파로 경복궁에서 예정된 패션쇼가 취소됐다. 기모노를 입은 것도 아닌데, 화보를 찍지 못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나 역사와 상징을 따진다면 조선 총독과 미 군정사령관이 살던 곳에 대통령 집무실을 둔 것부터가 어불성설이다.
창작 영역, 심지어 남의 사적 활동에까지 ‘태도’와 ‘경우’의 잣대를 들이대는 집단적 엄숙주의는 세상 모든 일을 논란거리로 삼을 준비가 돼 있다. 국립박물관에서 열린 외국 정상 환영만찬이 논란으로 이어졌고, 가수 싸이의 콘서트는 가뭄 와중에 물을 낭비한다는 손가락질을 받았다. 비도 안 온 남부지방의 한 아파트는 서울 호우 때 입주행사를 열었다가 된서리를 맞았다.
집단의 완력으로부터 개인을 보호하며, 자유ㆍ다양성ㆍ창의성을 증진하는 것은 역사 발전의 보편적 방향이었다. 그런 차원에서 2022년은 전보다 후퇴한 세상이다. 2002 월드컵 때를 돌아보면 장례식장을 찾은 조문객들이 축구를 보며 “대~한민국”을 외쳤고, 상주는 골 장면에서 박장대소했다. 천붕(天崩)의 고통 속에서도 대표팀 골에 기뻐하는 감정의 돌변은 자연스럽다. 영정 앞에서 통곡하다가도, 한달음에 달려온 지인의 얼굴에 웃을 수 있는 존재가 사람이다.
모순ㆍ반어ㆍ불일치는 삶의 일부고, ‘장례의 환희’나 ‘혼례의 비통’ 같은 역설은 실제 삶에서 얼마든지 가능하다. 사람의 감정은 희로애락 네 개의 실이 엇갈리며 짜내는 울퉁불퉁한 결과물이라, 삶의 표면은 생각처럼 매끈하지 않다.
지금은 유감스럽게도, 특정 복장을 요구하는 드레스 코드는 옅어졌을지언정, 남에게 특정 감정을 강요하는 ‘이모션 코드’가 자유의지를 제약한다. 엄숙주의는 △오지랖 전통 △정치 과잉 풍조 △인터넷 패거리 문화 △사인에게 공인의 윤리를 요구하는 이상한 결벽증과 맞물려, 보편 가치인 자유와 다양성을 억압하는 도덕 전체주의 수준에 이르렀다.
장례식 환호 사진이 지금 공개됐다면 어땠을까? ‘불편러’의 집요한 공세와 언론의 확대 재생산이 이어지며, ‘장례식 태도 논란’이 불붙었을 것이다. 상주와 조문객 SNS 계정은 도덕 자경단들에게 맹폭을 당했을 게 뻔하다.
깐깐하게 경우를 따지고, 남의 태도를 실눈으로 살피는 것은 돌발사태 방지나 질서 유지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세상을 바꾸는 건 남들과 다른 생각, 기존에 없던 접근, 형식에 구애 받지 않는 창의력이다.
불편감을 느끼는 건 자유다. 하지만 “너는 왜 불편해하지 않느냐”며 동조를 강요하면 폭력이 된다. 과도한 엄숙주의는 모난 돌을 깨는 것으로 시작해, 나중엔 돌 표면 작은 돌기 하나까지 용납 못할 교조적 모습으로 세를 불릴 것이다. 엄숙주의자가 승리할 때마다 세상엔 존재하지 않던 금기가 생겨나고, 그렇게 세상 곳곳에 똬리 튼 금기들은 나와 당신의 자유의지와 행동 하나하나를 검열할 것이다.
한 번 불어닥친 엄숙주의 바람을 잠재우긴 쉽지 않다. 목청 높은 소수의 분탕에 맞서 조용한 다수가 중심 잡고 ‘강요된 불편’에 동조하지 않는 게 그나마 유일한 해법. 그러나 논란을 만드는 쪽의 기동성이 숙고하는 이의 진중함을 언제나 속도에서 앞서기에, 그런 자정이 쉽지 않다는 게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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