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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인플레감축법 시작에 불과... '공급망 보호무역' 극복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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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경제의 화두로 떠오른 ‘글로벌 공급망(GSCㆍGlobal Supply Chain)’ 이슈가 우리 경제에도 실질적 파장을 던지는 해일이 되어 몰려오고 있다. 당장 미국이 최근 제정한 ‘인플레이션감축법(IRA)’에 따라 한국산 전기차가 대당 7,500달러에 달하는 미국의 전기차 보조금 지급대상에서 제외돼 현대ㆍ기아 전기차의 현지 수출에 비상등이 켜진 게 대표적이다.
IRA에 따라 전기차 구매자에 대한 미국 보조금 지급대상에서 한국산이 제외된 건 미국 의회가 공급망 안정화 정책 차원에서 보조금 지급대상을 ‘북미에서 최종 조립되는 전기차’로 제한하는 규정을 뒀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식의 공급망 안정화 정책 시행이 비단 미국에만 그치지도 않을뿐더러, 적용 품목 또한 전기차에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미 유럽과 중국 등 거대시장이 역내에 자족적 공급망 구축을 위한 정책을 본격화하기 시작함으로써 그동안 자유무역체제에 기반한 국제분업체계가 근본부터 흔들릴 상황에 처했다.
변화는 수출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온 우리 경제에도 심각한 도전이 될 전망이다. 우선 주요 시장에서 공급망 이슈를 빌미로 외국산에 대한 무역장벽이 높아질 위험이 커졌다. 또 생산기반 해외 이전에 따른 국내 생산력 및 일자리 위축 가능성도 커지게 됐다. 연원호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경제안보팀장은 “글로벌 공급망 이슈 파고는 우리에게 위기이자 기회”라며 “격변에 맞춘 지혜롭고 기민한 무역ㆍ산업정책이 절실한 시점”이라고 말한다. 글로벌 공급망 이슈의 현황에 대한 연 팀장의 평가와 분석을 듣는다.
-글로벌 공급망(GSC) 이슈란 무엇인가.
“글로벌 공급망 이슈와 관련해 국내에선 글로벌 가치사슬을 뜻하는 ‘GVC(Global Value Chain)’라는 이니셜이 자주 쓰이는데, 그보다는 물류 공급에 초점을 둔 ‘GSC(Global Supply Chain)’라는 이니셜이 요즘 미국에서 정착되고 있고, 의미상으로도 맞는 것 같다.
글로벌 공급망, 곧 GSC 이슈는 국제분업체계를 기반으로 한 자유무역으로 각국이 필요로 하는 물품들이 원활히 공급될 수 있을 것이라는 그동안의 통념을 뒤집는 심각한 공급난이 나타남에 따라,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들이 경제안보 차원에서 공급망 안정화를 꾀하고자 하는 정책을 추구하는 최근 흐름을 말한다. 예컨대 코로나19 초기에 중국이 마스크 수출을 제한했고, 미국 역시 개발된 백신의 자국 우선 사용을 위해 해외수출을 제한했다. 위기 시 자국우선주의가 대두되며 통상적 무역에 따른 기존 공급망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는 걸 확인한 거다. 그래서 최소한 핵심 품목들에 대해 안정적 공급을 보장하기 위한 정책이 추진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 반도체 배터리 희토류 의약품 등 4가지 품목에 중점을 두고 강력한 공급망 안정화 정책을 펴고 있다."
-요즘 반도체 공급난을 예로 들어 글로벌 공급망 위기 메커니즘을 정리한다면.
“코로나19가 촉발 원인으로 꼽힌다. 예측하지 못한 위기가 공급망을 무너뜨린 사례인 셈이다. 코로나19가 확산하면서, ‘언택트(Untact)’ 기술과 그 기술을 구현하는 서버나 PC 등 전자기기 수요가 폭증했다. 그게 업계의 예상치를 훨씬 뛰어넘는 반도체 수요로 이어졌다. 파운드리 업체들은 정보통신기기 등에 쓰이는 첨단 반도체 생산을 늘리는 쪽으로 생산라인을 대거 조정했다. 그런데 이번엔 자동차 수요가 폭증한 거다. 게다가 인포테인먼트 시스템 등 첨단기술이 보편적으로 쓰이면서 차량용 반도체의 고급화 수요까지 더해져 극심한 공급난이 빚어지고, 글로벌 반도체 수급 균형이 거의 붕괴하다시피 한 것이다.
외교갈등으로 중국이 호주산 석탄 반입을 금지하면서 중국 내 규소, 텅스텐 등 반도체 필수 소재를 생산하는 공장들의 가동이 어려워지고, 소재가격이 급등한 것도 공급난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반도체 공급난은 결국 완성차 공급난으로까지 이어졌다. 요컨대 공급망 위기는 수급 불균형, 국제정치, 물류망 등 여건 악화에 따라 언제든 발생하고 확산할 수 있는 위험이라는 사실이 확인된 셈이다.”
-글로벌 공급망 이슈와 관련한 각국 대응 및 정책 전개 상황은.
“공급망 안정화 목표는 같지만, 구체적인 정책은 나라별로 좀 차이가 있다. 미국 공급망 안정화 정책은 두 갈래다. 하나는 역내에 자족적 공급 역량을 구축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신뢰할 만한 국가들과 협력해 공급망을 안정화시키는 전략이다. 자족적 공급 역량을 구축하는 정책은 부품 및 완성품 생산시설을 해외로부터 미국으로 이전시키거나, 자국 생산기반을 육성하는 방향으로 추진되고 있다. 최근 삼성전자, 현대ㆍ기아차 등 우리 기업들의 미국 직접투자 확대 흐름이 이를 반영한다. 최근 미국에서 제정된 ‘반도체칩과 과학법(CHIPS and Science Act)’, 논란을 빚고 있는 ‘인플레이션 감축법’ 등이 법적 기반이다.
국가 간 협력을 통한 공급망 안정책은 주로 동맹국을 네트워킹하는 방식인데, 유럽과 첨단기술 협력 강화를 위한 ‘미·EU 무역기술위원회(US-EU TTC) 가동을 비롯해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 ‘핵심광물안보파트너십(MSP)’ ‘팹4(FAB4)’ 등이 추진되고 있다.
유럽 역시 미국과 유사한 역내 생산 역량 강화 및 국가 간 네트워킹 강화를 추구한다. 2019년부터 가동된 ‘호라이즌 유럽 프레임워크’나, 역내 반도체 생산역량 제고를 위한 ‘유럽반도체법(European Chips Act)’ 등이 가동 중이다.
중국은 1987년 덩샤오핑 주석 당시 정립된 ‘쌍순환(雙循環·Dual Circulation) 전략’에 따라 진작부터 공급망 안정화 정책을 추구해왔다고 볼 수 있다. 쌍순환은 수출과 내수 양쪽의 대순환이 원활하도록 경제기반을 발전시킨다는 개념인데, 시진핑 주석은 최근 내수를 기반으로 역내에 자족적 공급망을 구축해 해외공급망 의존도를 낮추는 공급망 안정화 정책 차원의 쌍순환을 강조하고 있다.”
-미국 바이든 정부 공급망 재편 정책의 경과와 내용은.
“바이든 정부는 작년 1월 출범과 함께 즉각 자국 내 공급망 점검에 주력했다. 그리고 2월 반도체 등 4개 핵심 품목의 공급망 취약점을 100일간 점검하는 행정명령을 발효했다. 아울러 1년간 국방, 공중보건, 통신기술(IT), 운송, 에너지, 식품 생산 등 6개 산업에 대한 공급망도 검토해 산업 취약점 및 생산 확충방안을 마련코자 했다. 그런 점검작업과 함께 공급망 안정 및 자국 제조업 역량 제고를 위한 입법도 추진됐다. 지난해 상원을 통과한 ‘미국혁신경쟁법’이나 ‘US·EU TCC’, 올해 하원의 ‘미국경쟁법’과 ‘연방조달규정’ 개정을 거쳐 ‘반도체칩과 과학법’ ‘인플레이션감축법’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산발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공급망 안정을 위한 자국 내 제조업 생산력 육성과 해외 네트워크 강화 등을 겨냥한 일관된 정책을 반영하고 있다.”
-글로벌 공급망 이슈와 관련한 핵심 산업은 어떤 것들인가?
“공급망 이슈의 핵심 품목과 산업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앞서 말한 대로 미국은 반도체 등 4개 핵심품목과 통신기술(IT) 등 6개 산업을 공급망 안정화 정책의 대상으로 선정했다. 유럽이나 중국, 일본 같은 다른 나라들도 비슷하다. 첨단 및 전략산업의 공급망을 안정화하는 게 목적이고, 그러자면 해당 산업에 소요되는 주요 품목의 안정적 공급을 확보하는 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다만, 국가별로 자원의 분포나 생산설비 인프라, 산업구조에 따라 공급망 안정화 정책의 우선순위 등은 다를 수 있다. 같은 반도체 공급망이라도, 미국이 반도체 파운드리 생산설비의 역내 확충에 주력하고 있다면, 중국은 반도체 초집적 첨단기술과 장비 등의 안정적 확보가 공급망 정책의 우선일 수 있다는 얘기다.”
-글로벌 공급망 이슈는 기존의 국제분업체제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게 되는가.
“앞서 잠깐 언급했지만, 그동안 자유무역체제하에서의 국제분업체제는 GVC, 즉 글로벌 가치사슬, 즉 밸류체인에 따라 형성됐다. 자유로운 교역을 전제로 최적의 경제적 효율성과 각국의 여건에 맞춰 분업체제가 구축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자동차, 철강, 조선 같은 전통적 중후장대형 제조업이 미국과 유럽에서 일본을 거쳐 한국과 중국으로 이전됐던 게 전형적인 예다. 그 과정에서 선진국들은 자본투자나 고부가가치 공정에 주력하고, 상대적으로 저부가가치 제조공정은 임금 수준에 따라 동아시아 국가들이 맡게 된 거다.
반도체만 해도 최근까지는 미국과 유럽이 첨단 기술과 장비 개발, 팹리스를 통한 설계 등을 맡았고, 일본은 주로 소재 가공과 일부 장비산업을 분점했다. 한국은 종합반도체 생산, 대만은 위탁생산을 담당했으며, 중국은 원자재 공급지로 분업화했다.
하지만 공급망 개념은 생산의 효율적 분업화보다는 제품생산의 전 과정이 차질 없이 진행돼 소비자에게까지 제때 원하는 만큼 공급될 수 있도록 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따라서 비록 낮은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공정이라도 그 생산단계가 전체 생산과정에서 필수불가결한 경우에는 지대한 중요성을 갖게 된다. 미국이 반도체나 전기차, 배터리 등에서 역내 제조업 생산기반을 재구축하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공급망 이슈를 내세운 보호무역주의 득세를 우려하는 시각도 많다. 그런 관점에서 공급망 이슈는 정당한가.
“반드시 필요하지만, 극단적 자국 이기주의나 고립주의로 치닫는 건 부당하다. 미국이 한국에서 조립돼 수출하는 전기차에 대해 구매 보조금 지급 대상에서 제외하는 걸 어떻게 정당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미국에서 팔려면 미국에서 공장 짓고 만들어라’라는 식은 교역품에 대한 공정한 대우를 전제로 한 기존 무역질서와 글로벌경제 시스템에 대한 저돌적인 도전일 뿐이다. 바로잡아야 마땅하다.
다만 공급망 이슈가 극단적 보호무역주의, 불공정 무역으로 치달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본다. 자원의 국가별 편중 현실이나 글로벌 시장 상황, 분업의 효율성 등을 하루아침에 무시하는 생산체제 구축은 불가능하고 바람직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미ㆍ중 반도체 전쟁이라지만, 미국 역시 중국과의 교역을 포기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따라서 지금의 공급망 이슈는 일단 주요 품목에 대한 역내 생산력 강화와 ‘마음이 맞는 국가(like-minded country)’들과의 협력 강화 등의 수준으로 진행되면서 구조적 균형점을 찾는 방향으로 진행될 것이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이 우리나라 수출과 산업에 미칠 영향은.
“공급망 재편은 단기적으로 우리 기업들의 해외시장 진출 및 확대의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주요국들은 공급망 다변화 측면에서 역내 생산역량 강화를 주요 전략으로 채택했지만, 생산기술을 개발하고 생산시설을 구축하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 따라서 이미 우리가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분야의 경우, 각국의 공급망 다변화 전략을 활용하고, 첨단기술 발전과 기후변화 등으로 변화하는 미래 수요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신속하고 적극적인 해외시장 진출의 기회로 삼을 수 있다.
미국의 한국산 전기차 보조금 제외처럼 돌발성 무역장벽이 구축될 수도 있지만, 현지 생산설비 구축계획과 경제동맹 정신에 입각한 합리적인 조정이 가능할 것이다. 다만 공급망 이슈가 지나쳐 장기화하고, 보호무역주의와 블록경제가 강고해지는 상황이 빚어지면 부작용이 적지 않을 것이다. 국내 생산기반의 해외 이전, 수출시장의 위축, 현재 비교우위에 있는 우리 중추 산업의 경쟁력 저하 등의 리스크가 현실화할 수 있다. 그런 상황에 대비해 수출시장 재편과 함께 R&D를 통한 공급망상의 병목지점(choke-point) 또는 핵심기술 확보가 중요하다고 본다.”
■최근 6년간 우리나라 해외 직접투자 추이
-실제 공급망 이슈 대두에 따른 국내 핵심산업 설비투자가 미국 유럽 등으로 유출되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어느 정도이고, 앞으로 산업정책에서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삼성전자, LG전자, 현대ㆍ기아차 등의 설비투자가 잇달아 미국 유럽 등으로 향하는 게 공급망 이슈와 관련된 건 어느 정도 사실이다. 당분간 이런 추세가 이어지지 않을까 한다. 최근 6년간 우리나라 해외 직접투자 추이 속에서 2021년 상황을 보면 아시아 투자 규모는 2019년과 2020년 대비 각각 -11%와 0%를 기록했다. 반면, 북미 투자는 같은 기간 각각 80%, 68% 폭증했다. 미국의 공급망 안정화 정책이 작용한 결과로 해석할 여지가 충분하다.
이런 상황은 기업들로서는 해외진출의 좋은 기회로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라 경제로 볼 땐, 산업생산 기반의 약화와 일자리 위축 등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산업구조개혁을 통해 최첨단ㆍ고부가가치 부문 전략산업은 국내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육성ㆍ지원책이 필요하다. 특히 향후 전기차, IoT, 자율주행, 탈탄소 관련 신기술ㆍ신산업 관련 제품의 수요 증가에 대비한 수출 다변화 및 공급망 재편 전략도 강구돼야 할 것이다.
직접투자 유출만큼, 해외 직접투자 유입이 더 활성화할 수 있도록 적극적인 투자유치책도 절실하다. 일자리 창출을 위해선 서비스업 혁신 같은 구조개혁 과제도 조속히 이행돼야 할 것이다.”
-공급망 재편과 관련해 한·미, 한·중, 한·일 관계 변동과 재정립 방향은.
“중국과의 통상갈등을 우려하는 시각이 적지 않다. 하지만 미국과 협력 강화를 선택한 우리나라의 정책방향에 대해 중국도 그 불가피성을 인정할 여지가 충분하다. 그런 이해를 바탕으로 상호 이해를 증진하는 방향으로 관계를 재정립해야 할 것이다. 다만 산업구조 면에서 한ㆍ중은 이제 더 이상 수직적 분업관계가 아닌, 수평적 협력 관계로 봐야 한다. 따라서 공정한 경쟁, 안정적 공급망, 예측 가능한 비즈니스 환경 조성 등의 경협 논의의 중심이 될 것이다.
한·미관계는 현 정부 들어서면서 안보동맹을 경제까지 확장하는 방향을 잡았는데, 불가피한 선택이다. 미국은 우리에게 첨단기술과 신시장을 제공하고, 우리는 제조역량을 기반으로 미국 투자 등을 통해 공급망 안정화에 기여하는 방향이 맞다. 일본은 미ㆍ중 대립과 공급망 이슈 대두 속에서 우리와 이해를 같이할 수 있는 부분이 가장 많은 나라다. 현실적 필요를 위해서라도 관계 정상화가 어느 나라보다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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