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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데우고 졸여서, 오래오래 간직하는 일

입력
2022.08.26 22:00
23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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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20분 간격으로 도착한 두 개의 복숭아 박스 앞에서 나는 당혹스러운 한숨만 흘렸다. 열 개 남짓 들어가는 예사 복숭아 상자가 아니었다. 약속이나 한 듯 아주 커다란 스티로폼 박스에 차곡차곡 담은 모양새로 미루어 합하면 100개가 훌쩍 넘을 듯했다.

아버지와 큰언니가 따로 보낸 상자를 열어 살펴보니 양쪽 다 흠결이 있었다. 묻지 않아도 알 만했다. 엊그제 그 동네에 퍼부은 비바람으로 인근 복숭아 농장에 낙과가 생겼고, 서로 다른 농장의 구조요청을 받은 아버지와 큰언니가 달려가 엄청난 양의 낙과를 사들였을 것이다. 사방으로 퍼져 가는 복숭아 향을 따라 막 인화한 컬러사진 같은 이미지가 나풀나풀 떠올랐다.

47년이나 지난 어느 늦여름의 이야기.

밤새 몰아치던 비바람이 잦아들기 무섭게 언니와 나는 바로 위 산 너머 비탈에 있는 복숭아밭으로 달려갔다. 낙과를 줍기 위해서였다. 탐스러운 복숭아들이 사나운 비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여기저기 떨어져 있었다. 안쪽의 낙과를 주우러 들어가는데 물기 머금은 나뭇가지들이 우리 몸과 닿으면서 위태롭게 달고 있던 무르익은 열매들을 우수수 떨구어냈다. 신이 난 우리는 막 떨어져 깨끗한 복숭아를 주워 담았다. 가득 찬 바구니를 집으로 들고 와서 자랑했다. 신나게 떠드는 우리 쪽으로 온 아버지가 바구니 안의 복숭아를 살펴보고 계셨다. "이 복숭아가 정말 땅에 떨어져 있던 것이니?"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나가는데 나무가 부딪히면서 복숭아가 막 떨어졌어요." 아버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점심을 먹자마자 아버지는 집을 나섰다. 멀리 청주 시내에 산다는 밭 주인을 찾아가 우리의 잘못에 대한 용서를 구하고 복숭앗값을 지불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큰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왠지 나쁜 사람으로 몰린 듯 울먹이는 우리를 불러 앉힌 건 큰언니였다. 한참 골똘하던 큰언니가 입을 열었다. "봤니? 바로 저 모습이 우리 아버지 지성덕씨의 본질이야." '자유교양경시대회' 장원 수상자로서 고고한 교양미를 뽐내던 큰언니다운 언어 선택이었다. "그리고 명심해. 오늘 아버지의 행동이 앞으로 너희들의 삶에서 중요한 잣대이자 유산이 될 거라는 사실을." 의미를 다 해독하지는 못했지만, 열일곱 살 큰언니가 천천히 내뱉던 말들과 표정만은 초점이 명확한 사진처럼 내 머리에 박혔다.

성한 축에 속하는 복숭아들만 골라 세 개의 상자에 담았다. 흉잡지 않고 먹어줄 지인들에게 보내고도 50개 넘는 복숭아가 남았다. 깨지고 멍들고 벌레 먹은 것들을 다시 분류해 단단한 황도는 청으로, 다 익은 백도는 콩포트로, 물러 터진 과육은 잼으로 만들었다. 두 시간 넘게 썰고 데우고 졸이는 동안 그 옛날 아버지와 큰언니의 눈빛이 떠오르고, 어느새 구순과 60대 중반이 된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날라리처럼 살아온 나는 아버지의 유산을 삶으로 새기지 못했다. 다만 그 뜻을 고스란히 흡수한 큰언니와 아버지가 여전히 내 곁을 지켜준다는 건 얼마나 행운인가. 이 복숭아들을 꺼내 먹는 동안 가을이 가고 눈 내리는 겨울을 지나서 복사꽃 날리는 봄이 올 것이다. 그리고 나는 또 복숭아를 먹을 때마다 두 사람과 함께해온 삶을 소환할 것이다. 뭐 대단한 효용이 있겠냐만, 이것만으로 썩 괜찮은 삶이지 생각하며 50개 넘는 낙과를 갈무리했다.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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