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판결은 재판받는 사람에게만 효력이 있지만, 대법원 판결은 모든 법원이 따르는 규범이 된다. 규범화한 판결은 일상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친다. 판결과 우리 삶의 관계를 얘기해본다.
사실혼 배우자를 차별하는 한국 법체계
주요국은 입법·판결 통해 사실혼 보호
사회변화 반영 대법원 전향적 판결 시급
요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사람들에게 많이 회자되고 있다. 필자는 법정 드라마는 잘 보지 않는데, '우영우'는 재미있게 보았다. "이의 있습니다"라고 외치는 드라마 속 법정의 모습은 현실과는 좀 다르지만 사건을 풀어나가고 법률을 적용하는 과정을 보면 법률가의 입장에서도 "어, 꽤 정확하네" 하는 인상을 받는다. '우영우'에서는 상속 문제가 여러 번 나온다. 첫 회에서 할머니가 할아버지의 괴롭힘을 못 견뎌서 다리미를 휘둘러 살인미수로 기소되는 사건이 나온다. 이때 우영우 변호사가 살인미수가 되면 상속을 받을 수 없다고 하면서 무죄 주장을 해야 한다는 장면이 등장한다. 필자도 정명석 변호사처럼 꽤 놀랐다.
그런데 여기서 이런 생각도 한번 해봤다. 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법률혼이 아닌 사실혼 관계였으면 어떻게 될까? 상속결격을 생각해볼 필요도 없이 할머니는 상속을 못 받는다. 아무리 오랫동안 같이 살아도, 같이 돈을 벌었어도, 둘 사이에 자녀까지 있다고 하더라도 사실혼 배우자는 상속을 받을 수 없다.
재미있는 것은 사실혼 배우자가 상속은 못 받는데, 재산분할은 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할머니가 할아버지 사후에 할아버지 재산으로 생계를 꾸려가려면 할아버지가 지병이나 사고로 돌아가시기 전에 별거와 함께 사실혼 관계가 끝났음을 공공연히 알리고 법원에 재산분할 청구를 해야 한다. 만약 '우영우'의 할아버지, 할머니와 달리 둘 사이가 나쁘지 않다면 정말 난처하다. 할아버지 생전에 혼인신고를 해야 하고, 만약 할아버지가 혼인신고를 못 할 사정이 있다면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지병으로 돌아가실 것 같으면 별거와 함께 재산분할 청구를 해야 한다. 만약 할아버지 재산을 증여로 받게 되면 배우자 상속공제는 전혀 받지 못한 채 고율의 증여세를 납부해야 한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은, 민법이 사실혼 배우자에게는 상속도 재산분할도 인정하지 않고, 대법원은 재산분할만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 사정은 우리와 좀 다르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는 사실혼 배우자에게 상속권을 법으로 인정하고 있고, 멕시코는 5년 이상 동거하거나 자녀가 있으면 상속권을 인정하고, 브라질은 상속재산 일부를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고 있다. 미국의 일부 주는 법으로 사실혼을 법률혼과 같이 취급하고 있는데, 그렇지 않은 주에서도 법원이 사실혼 관계를 묵시적인 동업과 비슷하게 해석하여 사실혼 배우자를 보호하고 있다.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노르웨이, 덴마크 법원도 사실혼 배우자 사이에 근로계약이 체결되었다거나 조합이 성립되었다거나 부당이득 법리를 이용하여 사실혼 배우자를 보호하고 있다.
우리 주변에서는 여러 가지 원인으로 사실혼 관계가 형성된다. 배우자와 사별하거나 이혼한 노인이 재혼하려는데 그 자녀들이 자신들에게 올 상속재산을 뻬앗길까 봐 부모의 혼인신고를 극구 반대하여 혼인신고를 못 한 채 사실혼관계로 살기도 한다. 이와 같이 재혼하는 경우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결혼식을 올린 젊은 부부들도 상당 기간 혼인신고를 하지 않는 사례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우리 사회는 기성 세대의 시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겠지만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다양한 형태의 남녀 관계가 존재하고 향후 사실혼이 더 늘어날 가능성도 커 보인다. 사실혼을 법률혼에 준하여 보호하는 입법이 이루어져야 할 때가 오고 있는 것 같지만 입법이 쉽지만은 않다. 그전이라도 대법원이 전향적 판례를 만들어 준다면 사실혼 배우자가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 결별을 선언해야 하는 상황은 모면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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