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하여

입력
2022.08.22 22:00
27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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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열역학적으로 말하면, 완전한 열적 평형 상태다. 불교식으론 더 이상 들고 남이 없는 적멸의 상태일 테다. 뇌과학적으로는 뇌의 전기적 정보 활동이 끝나는 것이다. 뜨거웠던 사랑의 시간과 성공의 환희는, 스치듯 지나간 뇌의 전기 폭풍 흔적이다. 죽음은 또 시공의 속박에서 풀려나 이 세계로부터 로그아웃되는 것이며, 일생 동안 꾸미고 전시해온 자아가 완전하게 소실되고 이야기 하나가 사라지는 것이다.

불교적 윤회가 있다 하더라도 이번 생과 다음 생 사이에 이야기의 연속성은 없다. 삼도천을 건너면 이승의 모든 정보가 포맷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생의 업보를 따지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 모든 삶은 우연하게 새로울 뿐이다.

삶에는 기쁨의 크기만큼 고통이 늘 따른다. 삶을 유지하는 일은 꽤나 힘들다. 매 순간 먹을거리를 찾아야 하고, 각종 위험과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해야 한다. 좋은 평판을 얻고 좋은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정신적·감정적 자원을 투입해야 한다. 그러다 간혹 관계에 실패하면 관계의 지옥에 빠진다. 인간의 비루한 욕망들이 관계의 균형을 이루고 품위를 갖추는 일은 참 어렵다. 그 어려운 일을 힘겹게 수행하고 나면, 약속처럼 죽음이 찾아온다. 트라피스트 수도회의 금언처럼 "오늘은 내 차례, 내일은 네 차례"다. 모든 괴로움에도 마지막이 있다는 생각이 종종 삶의 위안이 되기도 한다.

지난 2015년 간호사 출신의 75세 영국 여성 질 패로는 "내 삶이 다했고 죽을 준비가 됐다고 느낀다"며 스스로 안락사를 택해 화제가 됐다. 대상포진을 잠시 앓았을 뿐 건강에 별 이상이 없는 노년이었다. 그는 "보행기로 앞길을 막는 늙은이가 되고 싶지 않다"고 고백했다. 안락사를 위해 동행해준 남편과 라인강변에서 조용히 마지막 만찬을 즐겼다. 나는 죽음을 떠올릴 때마다, 질 패로처럼 삶의 마지막 스위치를 스스로 내릴 수 있는 품위에 대해 생각한다.

오래전 출간된 스티브 잡스 평전에 인상적 사진이 하나 있었다. 대부호의 거실엔 어떤 집기도 보이지 않았다. 오디오와 스탠드 등, 그리고 방석 하나가 전부였다. 잡스는 방석 위에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이 극단적 미니멀리즘이 잡스가 어떤 사람인지를 압축해 보여줬다. 용맹정진하는 스님들 방처럼 삶의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었다. 그의 멘토가 일본의 선승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는 늘 생사를 겹쳐 두고, 삶에 최선을 다했다고 믿는다. 스탠퍼드대학교 졸업식에서 한 그의 명연설에도 그런 생각이 나온다. 그는 죽음이 삶을 새롭게 하고, 또 죽음을 염두에 두면 삶의 잔가지들이 떨어져 나가 오직 진실로 중요한 것만 남는다고 말했다.

내가 작사한 정미조의 노래 '바람같이 살다가(2020)'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내가 떠나는 그 날에 / 내가 두렵지 않도록 / 오직 자유로움만이 내 마지막 꿈이 되길." 노래처럼 내 마지막 순간이 두렵지 않길 바란다. 그리고 광막한 우주적 우연 속으로 자유롭게 사라질 수 있길 바란다.

이번 여름 나는 어머니에 이어 큰누나와도 사별했다. 우리는 각자 우연한 삶을 얻었지만 기적처럼 가족이 됐다. 사랑의 기억만 남긴 채, 두 분이 다시 우연 속으로 걸어 나갔다. 이제 모든 욕망의 굴레를 벗고 자유와 안식을 얻었으리라 믿는다. 언젠가 너른 무욕의 바다에서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다.


이주엽 작사가·JNH뮤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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