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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의학유전학자의 우울증과의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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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 유전학(medical genetics)’은 특정 질병의 유전적 특징과 예방-치료법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유전성 질환은 부모에게서 직접 유전되기도 하고, 유전자 실수(gene mistake)라고도 불리는 돌연변이를 통해 후천적으로 발병하기도 한다. 세포 단위의 돌연변이는 인체 면역기능 등 DNA 자기수정능력으로 수정되기도 하지만, 기능이 약하거나 실수가 누적되면 질병으로 발현된다. 그렇게 유전자간 또는 유전자-환경의 상호작용으로 발병하는 복합성 질환은 현재 확인된 것만 약 1만여 종에 이른다.
근년의 우리는 신생아 때부터 신생아선별검사(newborn screening)로 대사장애 여부를 진단받고, 특정암 유발유전자 검사를 통해 유방암 등을 예방하고, 알츠하이머 등 수많은 유전 질환의 조기 진단도 받을 수 있게 됐다. 개인의 유전적 특질에 근거한 질병 예방 및 진단-치료를 의료계는 정밀 맞춤유전의료(Personalized Genetic Medicine)라 부른다. 생물학자 제임스 듀이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DNA 이중나선 구조’ 논문을 발표(1953)한 이래, 더 엄밀히 말하면 소수의 학자들이 DNA 단백질의 의학적 비밀에 천착하기 시작한 70년대 이래 약 50 년 사이에 이룬 성취다.
미국 의학자 리언 E. 로젠버그(Leon Emanuel Rosenberg, 1933.3.3~2022.7.22)는 의학(의료) 유전학을 독자적 학문으로 정립시킨 이들 중 한 명이다. 그는 68년 혼수상태로 소아집중치료실에 입원한 생후 20개월 된 아이(Lorraine)의 병증 즉 암모니아 중독 증상이 특정 효소(OTC) 결핍 때문에 비롯됐고, 그 결핍이 유전적 이상에 기인한다는 사실을 최초로 밝혀내는 등 300여 편의 단독-공동 논문과 임상시험을 통해 오늘날 유전자 검사를 비롯한 의학유전학 분야 전반에서 널리 통용되는 여러 대문자 약어들-OTC, MMA, CBS, PPC 등-을 세상에 내놓았다. 73년 미국 최초로 예일대 의대에 인간유전학(human genetics) 전공 및 진료과를 개설했고, 80년 미국인간유전학회(ASHG) 회장과 예일 의대 학장(84~91)을 지냈고, 미국 굴지의 제약회사(BMS) 과학팀(91~98)을 이끌며 신약 개발에도 기여했고, 만 65세 때인 99년 의대가 없는 프린스턴대 분자생물학과 교수로 임용돼 2018년 은퇴할 때까지 주로 학부생을 가르쳤다. 프린스턴대 측은 2002년 그의 과학 교양 강좌를 ‘로젠버그 강좌’로 개명했다. 다수의 영예로운 상을 수상했고, 80년대 미국과학아카데미(NAS)의 인간게놈프로젝트 추진 여부를 결정한 미 의회 특별위원회 12인 위원 등으로도 활약했다. 한마디로 그는 성공한 의학자였다.
하지만, 그의 학문적-세속적 성취 못지않게, 어쩌면 더 의학계와 세상의 주목을 끈 것은 2002년 10월 그가 뇌과학 저널 ‘CEREBRUM’에 발표한 ‘정신이상: 벼랑 끝으로 나아간 한 의사의 여정(Brainsick: A Physician’s Journey to the Brink)’이란 제목의 에세이였다. 글은 이렇게 시작된다.
“4년여 전- 정확히는 1998년 5월 26일- 나는 불안하고 두려운 또 한 번의 밤을 잠을 잃은 채 깨어 있었습니다. 새벽 4시 15분, 나는 눈을 감고 마음을 진정시키려 노력했습니다. 역시 소용이 없었습니다. 결국 침대에서 일어나 생각했습니다. ‘오늘은 끝내야지. 자지도, 먹지도, 가르치지도 못하고, 읽지도 쓰지도 못하겠어.’”
그는 아내를 위해 커피를 내리고, 만 16세 된 딸을 깨워 등교를 도운 뒤 자신(의 우울증)을 염려하던 아내를 안심시키곤 이발소에 다녀오겠다며 차를 몰고 집을 나섰다. 펜실베이니아 주 델라웨어 강물에 얼비치는 찬란한 아침 햇살도 운전을 성가시게 할 뿐이었고, 뉴호프(New Hope) 시내 방향을 가리키는 도로 표지판을 보면서도 ‘No Hope’란 말을 연상했다고 한다. 그는 작은 모텔에 방을 잡은 뒤 침대에 앉아 “마치 의식을 치르듯 천천히” 미리 챙겨 나온 항우울제와 수면제를 한두 알씩 1리터들이 보드카와 함께 모두 삼켰다. 첫 자살 시도였다.
약 12시간 뒤 다행히 그는 깨어났고, 심한 두통과 현기증, 구토증 등을 견디며 아내에게 전화로 도움을 청했다. 얼마 뒤 경찰과 함께 달려온 가족에게 이끌려 프린스턴 의대 응급실로 실려갔다. 예일대 의대 제자였던 젊은 당직의사가 그를 진료한 뒤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는 걸 누가 믿으려 하겠느냐”고 반문했다고 한다.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는 그에게 양극성장애(2형) 진단과 함께 전기경련치료(ECT)를 처방했다. 그는 의사인 자신이 지녔던 전기치료에 대한 그릇된 선입견과 함께 주3회 12차례 받은 ECT의 기적적인 치료 효과를 소개했다. 당시 그는 NIH 연구 예산 우선순위 평가를 위한 미 상원 의학분과위원회(IOM) 위원장 직을 맡고 있었다. 그는 치료 직후인 7월 7일 NIH 국장과 상원 담당의원에게 보고서를 기한 내에 제출하고 좋은 평가까지 받았다. 그는 “그날 나와 대화한 이들 중에 내가 최근에 정신을 잃었던 사실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으리라 확신한다”고 썼다.
의사나 과학자도 예술가나 작가 정치인들만큼이나 자주
자살(을 시도)하지만, 그들은 놀랍도록 침묵한다.
Leon Rosenberg, 'Brainsick'에서.
그의 우울증은 60년대부터 이어진 재발성 병증이었고, 가족력도 있었다. ECT 치료 후 의사는 리튬을 처방했고, 약 4년여 동안 탄산리튬을 복용한 이후 그는 단 한 번도 우울증을 경험한 적이 없다고, “3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그 저주에서 벗어난 것은 처음이었다”고 썼다.
그가 에세이를 쓴 이유는, 우울증 등 정신질환과 싸우는 것이 직업적인 평판과 성공, 특히 어떤 직업군보다 이성적이고 든든하고 (환자들에게) 신뢰감을 줘야 하는 자신의 직업군(의사, 과학자)에서도 양립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였다. 자살(을 시도)한 예술가와 작가, 정치인 등의 예는 많이 알려져 있지만 의사나 과학자들의 예는 놀라울 만큼 적다는 사실, 전문적 권위와 평판을 잃을 수 있고 의사 면허를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짓눌린 침묵 역시 ‘정신병(brainsick)’에 대한 편견의 결과임을 주장하기 위해서였다. 자신이 그랬듯 저 ‘불청객’은 나이나 직업을 구분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환기하며 정신질환도 조기 진단-치료를 받을 수 있고, 그러려면 용기를 내야 한다고 촉구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이제 내가 정신질환 때문에 자살을 시도했다는 사실을 이해합니다. 나는 심장마비를 관상동맥 질환의 최종 결과로 보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자살 시도를 정신 질환의 최종 결과로 이해합니다. 둘 다 잠재적이고 치명적이며(…) 공중보건의 주요 문제이며, 치료 및 예방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둘과 관련된 수치심은 크게 다릅니다. 심장마비 피해자들은 위로를 받습니다.(딱해서 어쩌나?) 자살 희생자는 비난을 받습니다.(그가 어떻게?)”
로젠버그는 러시아계 유대인 이민자의 3남 중 둘째로 위스콘신 주 매디슨에서 태어났다. 잡화상을 운영한 아버지는 지역 주민들의 유대계 편견이 영업에 지장을 줄까 봐 이디시어 어투를 고치고 지역 액센트를 구사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고 한다. 전업주부 어머니는 어릴 적 방앗간에서 겪은 사고로 왼손 엄지와 집게 손가락이 마비된 장애인이었다. 훗날 회고록에 로젠버그는 “나중에 의사가 돼서 어머니 손을 낫게 해드리겠다고 약속”한 일이 있었다고 썼다.
57년 위스콘신 의대를 졸업한 그는 뉴욕 컬럼비아장로회병원(CPMC) 인턴 기간을 거친 뒤 59년 “막연히 연구자의 삶이 멋져 보여서” 국립보건원 산하 국립암연구소(NCI) 연구원이 됐다. 석박사 과정 연구원의 삶은 어떤 지도교수를 만나느냐에 따라 더러 시궁창이나 늪에 빠진 듯한 경험을 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로젠버그의 NCI 첫 연구실이 그런 경우였다고 한다. 연구실 책임자는 근 10년간 연구원들을 부려 수많은 암 환자의 대사 관련 세부 데이터- 칼로리 섭취 및 소비량, 탄수화물과 지방 단백질 섭취량 등을 그램 단위로 정량화하고 혈액과 대소변의 20여 종 물질 농도를 측정한 방대한 데이터를 주며 “당신은 어떤 실험도 할 필요가 없다.(…) 당신의 임무는 이 데이터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는 아무 가설도 없이 저 긴 세월 동안 수많은 인력과 시간과 예산을 들여 데이터를 수집한 사실에 놀랐고, 처음 출근한 연구원에게 데이터의 의미를 찾아내라고 주문하는 데 경악했다. 그는 곧장 다음날 연구 전반을 관할하는 책임자(Nathaniel Berlin)를 찾아가 문제를 제기한 뒤 다른 팀으로 보내 달라고 청했다. 다행히 책임자는 그의 항변에 적극 공감하며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당신이 원하는 연구 주제에 맞는 팀을 찾아보라”고 말했다. 훗날 그는 그 책임자를, 학자로 산 세월 동안 만난 수많은 은인들 가운데 특히 고마운 멘토 중 한 명이라고 회고했다.
연구와 병행해, 그는 NCI에 입원한 급성백혈병 아동 등의 약물치료(화학요법)를 수행해야 했다. 근년에는 칵테일요법 등으로 부작용이 대폭 완화됐지만 당시 사정은 달랐다. 무수한 시행착오가 반복됐고, 아이들의 고통과 희생이 끊이지 않았다. 로젠버그가 임상적 우울증의 첫 에피소드를 겪은 게 20대 말이던 그 무렵이었다.
그는 스티븐 버스비(Steven Busby)라는 만 8세 근위축증 아이를 만난 게 생의 ‘행운’이었다고 했다. 아이는 만 3세 무렵까지 모든 신체적 발달 과정이 정상적이었다가 갑자기 가슴과 사지 등의 근육이 마치 녹아내리듯 위축되는 증상을 겪고 있었다. 그는 다양한 분석을 통해 소변의 아미노산 농도가 비정상적으로 높다는 사실(아미노산뇨증)을 확인했다. 하지만 소변 아미노산 농도와 근육 상실의 상관관계를 연구한 의학논문은 단 한편도 없었다. 고군분투하던 어느 날 그는 스티븐의 어머니와 대화 도중 아이의 형과 누나도 유사한 증상을 겪다가 10세 무렵 호흡근육 부전으로 모두 숨진 사실을 알게 됐다. 스티븐도 만 11세에 늑간 및 횡격막 근육약화에 따른 심부전으로 숨졌다. 그는 부모와 친척들의 소변 샘플을 얻어 분석했고, 스티븐의 질병이 상염색체상의 열성유전과 관련이 있다고 판단, 그 내용을 61년 미국의학저널(AJM)에 발표했다. 훗날 그는 “나는 스티븐의 병(버스비 증후군, 또는 롤리-로젠버그 증후군)을 낫게 하지는 못했지만, 스티븐은 내 연구의 방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환자를 만나 대화하며 질병을 연구하는 것이 마치 탐정의 일과 유사하는 것을 알게 했다”고 썼다. 이후 그는 소변 아미노산 과다의 원인 연구, 예컨대 신장에서 아미노산이 수송되는 과정의 이상여부를 규명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실험실을 찾아 나섰다. 그렇게 그의 의학유전학 연구가 시작됐다.
NCI 계약기간 만 3년을 마치고 3년 계약을 연장한 직후인 62년 7월, 그는 레지던트 과정을 수료하기 위해 예일대 의대(뉴헤이븐 병원)로 직장을 옮겼다.
레지던트 생활도 ‘의학유전학자’에겐 우호적이지 않았다. 신장내과 저명 교수에게 유전학을 전공하고 싶다고 했다가 “의학유전학 같은 건 없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왓슨과 크릭이 53년 논문으로 노벨생리의학상을 탄 게 그해 말이었다. 환자 가족들의 혈액을 채취하고 유전관련 질문과 상담을 해대다가 상급 주치의들로부터 “신의 역할(playing God)”을 하려는 거냐는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 그래도 그는 굽히지 않고 성인 다낭성 신장질환과 결장가족성용종증 등 유전적 질환 연구를 지속했고, 새로운 질문과 가설을 품고 이듬해 NCI로 복귀했다.
그리고 3년 뒤, 한 대학의 파격적 연봉과 조건을 뿌리치고, 연봉은 절반이었지만 연구 여건이 훨씬 좋았던 예일대 의대를 선택해 교수가 됐다.
그는 아미노산 대사 부산물인 MMA(메틸말론산)을 분해하지 못해 발병하는 치명적인 영아 유전성 대사 질병에 비타민12 보충제가 획기적인 치료 효과를 발휘한다는 사실 즉 비타민 반응성 유전병의 메커니즘을 최초로 규명하고, 자폐증 진단을 받은 소년 등의 사례를 연구해 선천성 대사질환의 일종인 ‘호모시스틴뇨증’의 증상과 치료법을 개발하는 등, 80년대 말까지 '과학 인생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1981년 그는 미 상원 소위원회 증언대에 섰다. 2년 뒤인 83년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생일을 연방 공휴일로 제정하는 데 가장 반발한 의원 중 한 명인 보수주의자 존 이스트(John East) 상원의원이 발의한 낙태 금지법안 공청회였다. 이스트는 의학-과학자들의 증언을 통해 인간의 생명이 수정 단계에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을 알려 낙태를 전면 금지하고자 했다. 증언대에 선 7명의 저명 과학자와 임상의 가운데 법안 취지에 반대한 건 로젠버그가 유일했다. 그는 “(낙태를 금지하는 게 너무나 중요해서) 출산의 선택과 책임의 주체인 여성과 커플의 다원주의적 견해를 우리 사회가 수용할 수 없다면, 차라리 헌법을 고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걸 정당화하기 위해 과학과 의학의 도움을 구하지는 마십시오. 왜냐하면 그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양심에 묻고, 목사나 신부나 랍비에게, 당신의 신에게 물으십시오.” 그는 생명 시작의 기준에 대한 과학적 증거는 어디에도 없으며, 달리 주장하는 과학자가 있다면 그건 한낱 개인의 편견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법안은 상원을 통과하지 못했다.
로젠버그는 예일대 학장 시절 소수자 문제 전담기구(Office of Minority Affair)를 신설, 여성과 소수민족-인종 학생들의 교육기회 확대 및 교수 채용에 공을 들였고, 인근 지역 저소득층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보건의료 사업에도 힘썼다. 지역 공립 고교생의 공부를 돕는 의대생 봉사자 모임에 그가 정한 행동수칙은 ‘인종주의를 비롯한 모든 형태의 불감증에 대한 거부’였다.
그는 54년 결혼해 2남1녀를 두고 72년 이혼했고, 79년 의학저널 편집장이던 다이앤 드로브니스(Diane Drobnis)와 재혼해 딸 하나를 낳았다. 그는 피부암의 일종인 편평세포암을 앓았고 폐렴으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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