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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 민주주의, 사회적 연대와 함께 가야 한다

입력
2022.08.22 00:00
27면
서울역 버스정류장(왼쪽)과 집중호우가 쏟아진 8일 밤 서울 강남역 일대. ⓒ게티이미지뱅크, SNS 캡처

서울역 버스정류장(왼쪽)과 집중호우가 쏟아진 8일 밤 서울 강남역 일대. ⓒ게티이미지뱅크, SNS 캡처

1년여 만에 다시 찾은 인천공항은 훨씬 활기를 되찾은 모습이었다. 아직 완전히 정상화되지 않았다지만 친절한 직원들의 안내로 검역과 입국심사 과정 모두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처리되었고, 완공된 지 3년이 되어가는 제2터미널은 여전히 밝고 깨끗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이동하면 금방 쾌적한 공항철도나 편안한 공항버스로 연결이 되어 다음 목적지까지 쉽게 이동이 가능하다. 13시간 전에 떠나 온, 긴 줄과 지연된 비행편에 지친 승객들로 가득한 비좁고 어둡고, 편의시설이 부족한 미 시카고 오헤어 공항과 무척 대조적이다. 공공기반시설에 제대로 투자하는 나라와 그러지 못하는 나라는 첫인상부터 이렇게 다르다.

모국의 좋은 인상은 공항에서 끝나지 않는다. 출퇴근 시간이 아니어도 지하철을 오래 기다리는 경우가 거의 없고, 마을버스도 자주 다녀 숙소에서 걸을 만한 거리에 있는 지하철역까지도 버스를 이용하게 된다. 습식 사우나를 연상시키는 날씨에도 대중교통에 냉방이 잘 되어 있어 땀 찰 일이 없다. 매일 이용하는 서울 시민들은 당연하게 여길 수도 있고 불만도 없지 않겠지만 서울의 대중교통은 자랑스러워할 만한 보석 같은 존재다. 이제 제법 무성해진 서울숲 나무 그늘 벤치에 앉아 있으니 뉴욕 센트럴파크에 온 듯한 착각이 들고, 오랜만에 지인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 식당과 카페들은 어디를 가도 깔끔한 인테리어, 맛있는 음식, 친절한 서비스로 손님을 맞는다.

2주 남짓 서울을 체험하면서 적어도 서울의 중산층 시민들은 이제 세계 어디를 가도 불편해서 살기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 중서부 대학도시 촌사람이 된 나에게 2022년 여름의 서울은 세상에서 가장 안목 높고 까다로운 소비자들을 만족시키기 위한 경쟁을 통해 끊임없이 진화하는 도시였다. 그 치열한 경쟁을 통한 진화가 활기 넘치고 재미있고 살기 편한 서울을 만들어 가고 있다. 세계 시장에서 선전을 거듭하는 한국 기업의 자동차와 가전제품의 경쟁력도 홈그라운드의 까다로운 소비자들을 상대하며 길러진 것이 아닐까?

다시 13시간 비행 끝에 혼돈의 오헤어 공항을 빠져나와 집에 돌아온 그다음 주, 뉴스에서 물에 잠긴 서울 강남의 사진과 반지하방을 빠져나오지 못해 숨진 일가족의 비극을 접했다. 기후변화와 불평등이라는 우리 시대 가장 큰 도전을 하나로 압축한 장면이었다. 까다로운 소비자들이 주도하는 소비자 민주주의에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이 이중의 도전에 대응하는 데도 효과적일지는 의문이다. 정치권력도 상품이 되어 팔리는 소비자 민주주의에서는 어쩔 수 없이 구매력이 큰 소비자들의 요구가 우선시된다. 개별화된 소비자의 편의와 효용을 극대화하는 소비자 민주주의의 논리에는, 공공선을 위해 그리고 사회의 약자와 소수자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불편과 손해도 감수할 수 있는 사회적 연대와 협력이 발 디딜 틈이 별로 없어 보인다.

그래도 나는 한국의 미래에 대해 낙관적인 편인데, 한국의 까다로운 소비자들의 민주주의 이면에는 1987년 민주화 운동, 1997년 외환위기 극복, 그리고 2016, 2017년 촛불시위처럼, 큰 도전에 직면할 때마다 폭넓은 사회적 연대와 협력을 통해 같이 위기를 해결해 온 시민들의 집합적 기억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 기억을 다시 꺼내 쌓인 먼지를 털어낼 때가 온 것 같다.


임채윤 미국 위스콘신대학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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