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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반도체 전사' 영입에 혈안...한국 인재까지 빨아들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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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산업에 2,800억 달러(약 370조 원)를 투자하는 반도체육성법(CHIPS법)을 통과시킨 미국. 반도체 패권 수복을 선언한 세계 최강대국의 다음 행보가 심상치 않다. 반도체 산업계와 여론 주도층을 중심으로 "외국인 반도체 인재를 대거 영입하기 위해 이민 정책을 손봐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이다. 미국이 반도체 관련 석·박사에게 영주권을 주며 문호를 대폭 낮추게 되면, 미국 기업이 전 세계 반도체 인력의 블랙홀이 되고 한국도 인재 유출 공포에 떨어야 하는 상황이 올 수 있다.
최근 미국 주요 언론 보도와 국내 과학계 및 반도체 업계의 정보를 종합하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9일(현지시간) 서명한 반도체육성법과 관련해 반도체 업계를 중심으로 "이 법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지적이 계속 나오고 있다.
법안 패키지에서 외국 인력을 미국으로 유치하는 이민정책 관련 내용이 빠져 있다는 것이 지적의 핵심이다. 반도체육성법은 2월 미 하원을 통과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이민법을 바꾸는 내용을 포함했다. △과학·기술·공학·수학(STEM) 분야 박사에 한해 영주권의 국가별 한도(7%)를 면제하고 △국익에 도움이 되는 특정 분야는 석사에게도 면제를 확대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상원을 거치며 법안에서 이런 내용이 빠지자 반도체 업계와 일부 국가안보 전문가들은 즉각 우려를 표했다. 수십조 원을 투입해 미국 내에 반도체 공장을 짓는다 하더라도 당장 일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정치 전문 매체 폴리티코에 따르면 윌리엄 코언·척 헤이글 전 국방장관, 노먼 어거스틴 록히드마틴 전 최고경영자(CEO) 등 유력인사 49명은 상하원 여야 대표들에게 "영주권 면제 조항을 살려 국가 안보와 국제 경쟁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촉구 서한을 보냈다.
"중국과의 경쟁은 세계 최고의 STEM 인재와 함께라면 지기 어렵지만, 그렇지 않다면 이기기 어려운 싸움입니다."
이들은 서한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관련 단체의 압력도 거세다. 고급 인재 이민을 지지하는 단체 콤피트아메리카는 9일 국무장관과 국토안보부 장관에게 보낸 서한을 통해 "영주권 적체 탓에 STEM 분야 숙련 외국인들이 영주권 취득을 포기하면서, 미국 경제에 타격을 주고 있다"며 제도 개선을 촉구했다.
반도체 회사들의 인식도 비슷하다. 인텔, AMD, 텍사스인스트루먼트 등 주요 반도체 기업 인사 담당 책임자들도 양당 지도부에 지난달 말 서한을 보내 △미국 국적 이공계 학생에 대한 투자 확대 △외국 국적 이공계 기술 인력 확보 필요성 등을 역설했다. 미국 보안신흥기술센터(CSET) 보고서에 따르면 계획대로 반도체 산업이 확장될 경우, 미국에는 단기적으로 약 1만3,000명의 새로운 엔지니어와 소프트웨어 개발자가 필요하다.
주요 언론도 분위기 조성에 나섰다. 뉴욕타임스 논설위원 파라 스탁맨(2016년 퓰리처상 수상자)은 지난달 25일 칼럼에서 "미국의 경제와 군대를 유지하는 것은 반도체의 안정적 공급에 달려 있다"고 강조했다.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폴 월드맨과 그렉 사전트도 "반도체 산업이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선 자금 조달뿐 아니라 이민을 통한 전문 지식 수입이 필요하다"며 초당적 협력을 제안했다. 다만 공화당 일부 정치인과 보수 유권자들이 이민 문호를 넓히는 것 자체에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이민법 개정을 가로막는 변수가 될 수 있다.
미국 반도체 업계가 주장하는 대로 이민법이 개정되면, 가장 큰 영향을 받게 되는 나라는 인도가 될 가능성이 높다. 싱크탱크 카이토 연구소에 따르면 지난해 9월 기준으로 쿼터에 밀려 영주권을 발급받지 못한 신청자의 82%가 인도 국적이다.
하지만 반도체가 한국의 최고 주력산업이고 한국 반도체 기업들 역시 인재 확보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점에서, 미국의 이민법 개정 움직임은 국내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국내 반도체 업계의 한 관계자는 "과거 중국으로 인력이 많이 빠져나갔지만, 그때는 돈을 위해 (사회적 평판 등) 많은 것을 포기하고 갔었다"며 "하지만 미국이라면 오히려 자랑스럽게 나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도 미국은 한국인들이 가장 이민을 가고 싶어 하는 나라다. 그리고 2010년부터 2020년까지 미국에서 이공계 박사학위를 딴 외국인의 국적을 보면, 한국인(1만168명)이 중국과 인도에 이어 세 번째로 많다. 한웅용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연구위원은 "이공계 박사의 경우 고연봉, 자녀 교육 등을 이유로 미국에 남으려는 경향이 높다"며 "영주권을 받는 게 더 쉬워지면 한국 입장에선 고급 인재 유출을 걱정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과학기술계에선 미국으로 인재가 쏠리는 상황을 대비해 한국도 인재 정책을 재정비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먼저 국내 인력을 잡을 '당근'이 필요한데, 국내 기업의 보수적 연봉 체계는 내부적으로 손봐야 할 지점으로 꼽힌다. 미국국립과학재단에 따르면 수학·컴퓨터 분야 박사학위 취득자가 미국 기업에서 받게 되는 연봉의 중간값은 14만4,000달러(약 1억9,000만 원) 수준이다. 여기에 실력에 따라 연봉의 몇 배가 넘는 수준까지 인센티브가 지급된다. 권오경 한국공학한림원 회장은 "한국은 일을 잘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의 연봉이 비슷하다"며 "적어도 돈 때문에 해외를 택하는 일은 없도록 손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대외적으로는 한국도 고급 기술을 갖춘 외국인 인력 유치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단순 육체노동 중심의 외국인 노동자 인프라를 고급인력 중심으로 재편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으로 갈 수 없는 인재를 잡는 전략도 효과적이다. 오래 전부터 이민청 신설의 필요성을 주장해 온 권오경 회장은 "이란 엔지니어들의 반도체 설계 기술이 뛰어나지만, 미국과의 관계가 정상적이지 않아 미국으로 취업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이공계 인재를 잡기 위해선 병역 특례(전문연구요원제도)도 활용할 필요가 있다. 전문연 제도는 이공계 석·박사들이 해외 대신 국내에 머무르며 연구 활동을 이어 나가게 하는 강력한 요인으로 꼽힌다. 이우일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국내 이공계 대학원 학생 수가 인문사회 분야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이유 중 하나는 병역 특례 때문"이라며 "공정성 문제가 없도록 보완해서라도 제도를 유지시켜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기술로 패권 경쟁을 해야 하는 때가 왔지만, 기술을 돈으로 살 수 있던 시대는 지났다"며 "우수 이공계 인력에게 인센티브를 줄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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