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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태평 루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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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놀라울 정도로 천하태평이었고 솔직했다. 추격당해 겁에 질린 희생자도 재앙의 원인도 아니었다." 2005년 미국 뉴욕에서 소설가 살만 루슈디를 인터뷰한 문예지 '파리 리뷰' 기사 속 인상평이다. 1989년작 '악마의 시'를 불경하게 여긴 이란 이슬람 지도자의 사형 선고(파트와)로 오랜 세월 은둔했던 필화의 주인공답지가 않았던 게다. 밸런타인데이였던 그날 인터뷰에서 루슈디는 "아내를 위해 어떤 선물이 적당할지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환갑에 가까운 나이에 23세 연하 인도계 여배우와 막 결혼한 참이었다.
□ 인도에서 태어나 10대 유학 시절부터 영국에서 살던 루슈디가 1989년 기자에게 파트와 선포 사실을 전해들은 날도 밸런타인데이였다. "기쁘진 않소"라고 심드렁하게 답했지만 속마음은 이랬다고, 2012년 출간한 자서전에 적었다. '이젠 죽었다. 며칠이나 더 살 수 있을까. 한 자릿수가 고작이겠지.' 자서전 제목 '조지프 앤턴'은 루슈디가 경찰 경호 아래 도피 생활을 하면서 쓴 가명이다. 존경하는 작가 조지프 콘래드와 안톤 체호프의 이름을 땄단다. 부적이라도 붙이는 심정이었겠지만, 루슈디는 "콘래드 체호프는 별로였다"는 익살을 잊지 않았다.
□ '악마의 시' 파트와가 작가뿐 아니라 출판에 관여한 모든 이를 처단 대상으로 삼은 탓에, 책 출간 이후 수년간 폭력과 방화가 빈발했다. 1991년엔 일본어판 번역가가 피살됐다. 이란 정부는 1998년 파트와를 철회했지만 루슈디는 여전히 과격 이슬람 세력의 표적이었다. 영국 경찰은 4년간 더 경호를 유지했지만 루슈디는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려 안달했다. 경호가 해제되자 런던경찰청에서 파티를 열었다. 일을 핑계로 미국에 자주 건너가 네 번째 부인이 될 배우와 바람도 피웠다.
□ 루슈디는 지난 12일 미국 뉴욕주에서 강연 도중 흉기 피습을 당했다. 레바논계인 젊은 용의자의 범행 동기는 아직 불분명하지만, 그가 이슬람 극단주의에 심취했다는 보도가 나오는 등 이번 사건이 30여 년 전 파트와와 무관치 않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실명 위험까지 거론될 만큼 중상을 입었지만, 루슈디가 입원 하루 만에 인공호흡기를 떼고 주변에 농담을 던졌다고 한다. '자유로운 영혼'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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