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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중국해' 분쟁서 중국에 판판이 깨진 베트남…치욕 삼키며 반전 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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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일간지 최초로 2017년 베트남 상주 특파원을 파견한 <한국일보>가 2020년 2월 부임한 2기 특파원을 통해 두 번째 인사(짜오)를 건넵니다. 베트남 사회 전반을 폭넓게 소개한 3년의 성과를 바탕으로 급변하는 베트남의 오늘을 격주 목요일마다 전달합니다.
같은 바다와 섬(암초)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이유는 딱 하나뿐이다. 특정국들의 이익이 걸린 영유권 분쟁. 그 치열한 싸움이 없다면 태평양과 괌을 다른 이름으로 표기하지 않듯, 그저 우리는 원래의 그곳 이름을 편히 쓴다.
국제사회에서 '남중국해'라 통칭하는 동남아의 작은 해협은 그래서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 중국은 이곳을 '남해', 베트남과 필리핀은 각각 '동해'와 '서해'라고 주장한다. 분쟁의 중심에 위치한 스프래틀리 군도 역시 마찬가지다. 중국은 이곳을 '난사', 베트남은 '쯔엉사', 필리핀은 '칼라얀 군도'로 지칭한다.
이름을 포기 못하는 건 그에 따른 이익도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남중국해는 지난해에만 5조3,000억 달러 상당의 물동량이 오간 국제물류의 요충지다. 전 세계 해상 무역의 60%가량이 이 바다를 지났고, 한국을 포함한 국제원유 수송선의 40%는 남중국해 항로를 정기 운항한다.
바다 밑도 돈다발로 가득하다. 31일 미국 에너지정보국 자체 조사 결과에 따르면, 남중국해에는 최소 190조 세제곱피트(ft³)의 천연가스와 110억 배럴의 석유가 묻혀 있다. 선을 잘 그어 남중국해를 자국 영해로만 편입하면, 해상 물류 통제 권력은 물론 막대한 자원 이익도 거둘 수 있다는 얘기다.
눈에 빤히 보이는 국익은 당연히 사생결단의 대치를 불렀다. 현재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 참전국은 △베트남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브루나이 등 동남아 국가들을 시작으로 중국과 대만까지 7개국에 달한다.
이들 중 가장 첨예한 갈등을 이어가는 국가는 베트남과 중국이다. 베트남은 타 동남아 국가들과 달리 인도차이나반도 동부에 있어 남중국해 거의 전 영역에 배타적경제수역(EEZ)을 그을 수 있다. 특히 베트남은 "프랑스가 베트남을 식민 지배하던 시절 스프래틀리 군도 등을 실효 지배했다는 역사적 증거와 자료가 남아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중국 역시 물러설 뜻이 없다. 이들은 "남중국해에 U자 형태로 그은 구단선(九段線) 안 바다는 우리 영해"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과거 중국의 수많은 왕조가 남중국해를 지배해 왔으니 '역사적 종주권'이 있는 자신들이 남중국해의 90%를 가져가야 한다는 논리다. 다만 중국은 구단선에 대한 문헌학적 근거를 아직 국제사회에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독도 사례에 민감한 우리 입장에선 당연히 베트남 측 주장이 수용돼야 하는 것 아니냐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베트남은 한국이 아니고, 중국도 일본이 아니다. 양국의 국력과 군사력의 차이가 한일 관계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극명한 데다, 중국은 베트남의 독립에 결정적 도움을 준 사회주의 형제 국가이기도 하다. 정상적으로 맞붙기엔, '체급 차'도 현격하고 '상하관계' 역시 분명하다는 얘기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베트남이 감내한 수모는 손으로 세기도 모자랄 지경이다. 중국의 첫 남중국해 무력 진출은 베트남 전쟁 휴전을 위한 '파리 평화협정'이 맺어진 이듬해인 1974년에 기습적으로 진행됐다. 당시 전쟁 마무리에 정신이 없던 베트남은 중국이 양국 사이에 위치한 파라셀(중국명 시사·베트남명 호앙사) 군도 내 일부 암초를 점거하는 작전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1988년에는 스프래틀리 군도에서 양국의 첫 무력 충돌이 벌어졌다. 해상전 경험이 거의 없던 베트남은 중국의 공격에 군함 세 척이 침몰당해 74명의 병력이 바다에 수장됐다. 전면전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피해였으나, 베트남은 추가 군사 대응을 하지 않았다. 베트남전 이후 발생한 경제난을 타파하기 위해선 중국 자본이 절실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베트남을 만만히 본 중국의 행동은 이후로도 거침없었다. 2014년 베트남은 파라셀 군도에 일방적으로 석유 탐사 시설을 짓던 중국에 항의하기 위해 초계함을 보냈다. 그러나 중국의 대답은 더 큰 함선으로 초계함을 들이받는 것이었다.
중국은 최근까지도 자국 어선을 수시로 분쟁 지역으로 보내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어 스프래틀리·파라셀 군도 내 11개의 암초와 인공섬에 지대공 미사일을 배치하고 전투기 활주로 공사까지 최근 완료한 것으로 알려졌다.
애국심만 따지자면 한국 못지않은 나라가 베트남이다. 그런 이들에게 자그마치 48년 동안이나 쌓인 중국에 대한 울분은 상상을 초월한다.
실제로 베트남의 억눌린 감정은 지난 2014년 남중국해 무력 충돌 사건 직후 폭발한 바 있다. 당시 중국기업들이 밀집해 있던 남부 빈즈엉성 시민 2만여 명은 "중국은 우리 땅에서 당장 떠나라"는 구호를 외치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일부 시위대는 중국이 운영하는 공장 15곳에 불을 지르고 중국인들을 폭행해 심각한 외교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한 차례 폭풍이 휩쓸고 간 베트남은 이후 매우 진중한 태도를 견지했다. 최근 중국이 일방적으로 남중국해에 여름 금어기를 설정할 때도, 눈앞에서 군사훈련을 벌여도 반응은 한결같다. "중국은 국제법에 따라 베트남의 주권을 존중하라"는 외교적 항의만이 유일한 공식 입장이다.
그렇다고 베트남이 남중국해를 포기한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이들의 최근 움직임은 입으로 친한 척하면서 배 속에 칼을 품고 있는 '구밀복검(口蜜腹劍)'에 더 가깝다는 게 현지 외교가의 중론이다.
베트남이 갈고 있는 첫 번째 칼은 '외자 유치에 기반한 독립 경제성장'이다. 베트남은 과거 중국에 의존했던 경제 인프라 투자를 각국으로 다원화하기 위해 지난해 1월 민관협력투자개발사업(PPP)법을 시행했다. 글로벌 기업들을 대거 흡수 중인 베트남이 인프라 투자 영역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지워내려는 것이다.
동시에 베트남은 중국의 현지 진출 시도를 철저히 배척하고 있다. 북부 하이퐁의 한 공단 사업자는 "굳이 중국 돈이 아니라도 베트남은 다른 국가들로부터 투자 유치가 충분히 가능해진 상황"이라며 "실제로 베트남 산업단지 부지를 사려는 중국 브로커는 물론 홍콩 및 싱가포르 등 중국 우회자본 회사들이 줄줄이 지방성(省)에서 승인을 거부당하고 있다"고 밝혔다.
'미국·일본과의 공조 및 지원 확대'는 베트남이 가장 예리하게 벼리는 칼이다. 미국은 베트남과 전쟁을 벌인 당사국이며, 일본 역시 2차 세계대전 당시 베트남을 식민 지배했던 나라다.
그러나 베트남은 지난해 13차 전국 공산당대회 이후 양국과의 관계 강화에 방점을 찍고 쉼 없이 이들과 접촉하고 있다. 미·일도 나쁠 게 없다는 입장이다. 중국의 남하를 남중국해에서 1차 저지해야 하는 양국과 이들의 힘을 이용하려는 베트남의 이해관계가 잘 맞아떨어지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미국은 지난 한 달 사이 스프래틀리 군도에 6,900톤(t)급 벤폴드함을 두 차례나 진입시키며 '베트남 힘 실어주기'에 나섰다. 일본은 후방지원 역할을 맡았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지난 5월 베트남을 직접 방문해 남중국해 해상 순찰을 도울 일본산 순시선 제공을 약속했다. 이어 일본은 베트남 해군 전력 및 사이버전 역량 강화 사업도 금명간 진행키로 했다.
남중국해 문제에 정통한 한 군사 전문가는 "어떤 방법을 써도 중국을 경제 및 군사력으로 즉시 넘어서기 힘들다는 것을 베트남이 제일 잘 알고 있다"며 "다만 이들은 '중국의 노림수를 효율적으로 방어하고 최대치의 국익을 반드시 수성(守城)한다'는 각오로 장기전에 돌입했다"고 말했다.
'우리가 다 가지지 못하는 것처럼 중국 너희도 그러할 것이다.' 말로 표현되지 않을 뿐, 베트남과 중국의 보이지 않는 갈등은 오늘도 남중국해의 심연으로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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