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황대기 50주년] 전설의 고교스타 남우식 "첫 대회 MVP 평생 못 잊죠"

입력
2022.08.18 07:00
20면

전 경기 완투…'철완' 별명 얻은 대회
박철순의 스승…전설을 만든 전설
고교야구 스타에서 대기업 CEO까지

1971년 제1회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MVP인 남우식 전 푸르밀 대표가 11일 한국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수원=고영권 기자

1971년 제1회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MVP인 남우식 전 푸르밀 대표가 11일 한국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수원=고영권 기자


“나더러 철완이라고 하더라고요.” 일흔을 넘긴 나이에도 어딘지 모를 강인한 아우라를 풍기는 노신사는 52년 전 그날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경북고 에이스 남우식(70). 고교야구를 떠들썩하게 했던 그가 이름을 가장 크게 각인시킨 무대는 3학년이던 1971년 8월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제1회 봉황대기쟁탈 전국고교야구대회’였다. 준결승까지 6경기를 완투한 남우식은 18일 대광고와 결승전에서도 어김없이 마운드를 혼자 책임지면서 1-0 승리를 이끌고, 대회 MVP에 선정됐다. 7경기에서 54이닝을 던지는 동안 단 2실점. 지금은 상상하기 힘든 기록이다.

전설의 야구선수로, 대기업의 CEO로 인생 2막까지 마친 그는 작은 사업을 하면서 노년을 준비하고 있다. 제50회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개막을 앞두고 지난 11일 만난 남 대표는 “봉황대기가 벌써 50주년이 됐다니 참 세월이 빠르고 감회가 새롭다”면서 아련한 기억의 파편들을 하나 둘씩 끄집어냈다.

남 대표는 고교야구 붐이 일던 1970년대 초 ‘탈고교급’ 투수로 명성을 떨쳤다. 스피드건이 없던 시절이라 정확한 구속은 알 수 없지만 그의 투구를 지켜본 야구인들은 “직구만 던져도 손도 못 댔다. 그 시절에도 150㎞는 됐을 것이다”라고 입을 모은다. 고교 시절만 놓고 보면 그의 인기는 선동열, 고(故) 최동원도 비할 바가 못 됐다.

1학년 때인 1969년 황금사자기에서 6경기를 완투하고 준우승과 감투상 수상, 2학년 때인 1970년 대통령배에선 MVP와 타격상, 화랑대기에선 최우수상 수상 등 나열하기 어려운 업적을 쌓아나갔다.

그의 기량이 절정에 오른 3학년 때 경북고는 그야말로 ‘어벤저스’였다. 동기생이 배대웅 천보성 정현발, 2학년에 황규봉과 이선희가 있었다. 그해 봉황대기를 비롯해 청룡기ㆍ황금사자기ㆍ대통령배 등 중앙 4개 대회와 지방에서 열린 화랑대기·문교부장관기까지 6개 대회를 모조리 휩쓸며 전무후무한 6관왕을 달성했다. 6개 대회에서 믿기지 않는 승률 9할(0.906ㆍ29승 3패)을 기록한 ‘1971년 경북고’는 지금도 한국 고교야구 역대 최강팀으로 꼽힌다. 경북고는 그해 11월 일본 규슈 원정에서도 6전 6승을 기록, 일본 야구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대통령배와 청룡기를 제패한 뒤 다음 대회가 봉황대기였다. “예선을 안 거치고 출전하는 대회, 한국의 고시엔 대회를 한국일보에서 새로 만든다는 얘기를 처음 들은 건 2학년 때였을 겁니다.”

남 대표는 당시엔 생소했던 단어인 ‘철완’이란 별명을 얻은 최초의 야구선수였다. 그가 군산상고와 준결승에서 연장 14회까지 완투하면서 승리를 이끈 뒤였다. 봉황대기 창설을 주도한 당시 장기영 한국일보 사주는 본부석에서 경기를 끝까지 지켜본 뒤 그라운드로 내려갔다. “남 선수, 어떻게 그렇게 연전연투할 수 있나 하시고는 제 어깨를 만지면서 당신은 철완이다라고 하시더군요. 그 이후로 저에게 철완이란 별명이 붙었습니다.”

그를 우러러보지 않은 선수는 없었다. 한양대 졸업반 때인 74년 말 특별우선지명권이 주어진 창단 실업팀 롯데에 입단한 뒤 77년 성무야구단(공군)에 들어갔다. "동기들보다 늦게 입대해 선임들이 야구로는 2, 3년 후배들이었죠. 하루는 키가 큰 상병 한 명이 이등병인 저에게 인사하며 투구 폼을 봐달라더군요." 1년간 남 대표의 지도를 받은 무명의 박철순은 그렇게 레전드의 서막을 열었다.

경북고 남우식이 1971년 8월18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제1회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대광고와 결승전에서 우승을 이끌고 MVP를 차지한 뒤 동료들의 헹가래를 받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경북고 남우식이 1971년 8월18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제1회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대광고와 결승전에서 우승을 이끌고 MVP를 차지한 뒤 동료들의 헹가래를 받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야구공 하나로 천하를 호령했던 남 대표는 곧 일생일대의 결단을 내린다. “군대를 다녀와서 롯데에 복귀한 1년쯤 뒤에 프로야구 출범 소식이 들렸죠. 프로야구에 가느냐, 팔꿈치도 안 좋았고 앞으로 운동해봐야 몇 년 하겠느냐를 두 달 정도 고민하다가 은퇴를 결심했어요.”

남 대표는 지도자 제의와 해외 연수도 마다하고 미련없이 유니폼을 벗었다. 그리곤 롯데축산 식품 영업부에 배정받았다. “영업도 모르고 세금 계산서가 뭔지도 모르고, 배워야겠다 해서 밑바닥부터 올라갔어요.” 사원 주임 계장 과장 대리 부장을 13년 간 차근차근 거친 그는 능력을 인정받아 총무부서로 옮겨서도 15년을 근무했다. 그리곤 2009년 푸르밀(구 롯데우유)의 CEO까지 올라 2015년 퇴임할 때까지 회사를 경영했다. 스포츠 스타가 완전히 새로운 분야에 뛰어들어 전문 경영인이 된 최초의 사례였다.

남 대표는 “사회 생활을 시작한 이후에도 초반에는 야구계로 다시 돌아오라는 제의가 많았지만 한 번 결정한 일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인생에 ‘만약’은 없지만 프로야구 선수가 됐다면 그는 영원한 대스타의 삶을 살았을까. “글쎄요, 장담할 수 없죠. 설령 성공해서 감독까지 됐더라도 얼마나 할 수 있었을까요.”

60대 중반까지 대기업의 CEO를 역임했고 재테크에도 혜안이 생겨 경제적인 자유를 얻은 그는 동기생들을 만나면 늘 나서서 지갑을 연다. 퇴임 후 타 기업에서 중역으로 러브콜을 받았지만 정중하게 고사한 이유다. 그래서 남 대표는 어린 후배들들에게 “30대가 되면 은퇴 준비를 해야 하는 게 운동선수의 숙명이다. 운동을 한다고 수업에 들어가지 않거나 일반 학생을 사귀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한다.

“야구선수 남우식의 황금기는 봉황대기로 정점을 찍었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첫 대회였기 때문에 저에겐 더욱 각별한 의미로 남아 있습니다. 앞으로 봉황대기를 통해 더 훌륭한 선수들이 나오고 100주년, 200주년 승승장구하길 바랍니다.”

수원=성환희 기자 hhs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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