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줄인데…" 폐지 줍는 노인들 삶 파괴한 '폭우'

"올해처럼 변덕스러운 여름은 처음"... 폐지 줍는 노인들에 더 야속한 비

입력
2022.08.16 04:30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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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면 일 못하고, 젖은 폐지 단가도 깎여

장대비가 쏟아지던 8일 저녁 서울 동작구 사당동에서 폐지를 줍는 한 노인이 빈 리어카를 끌고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다. 나광현 기자

장대비가 쏟아지던 8일 저녁 서울 동작구 사당동에서 폐지를 줍는 한 노인이 빈 리어카를 끌고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다. 나광현 기자

“폐지 주워 버는 돈으로 사는데, 비가 오면 밖으로 못 나가잖아. 하늘이 흐리면 덜컥 겁부터 나.”

12일 오전 10시 서울 중구의 한 고물상 앞. 폐지를 팔고 나온 임모(73)씨가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봤다. 8일부터 계속된 폭우로 임씨는 근 나흘째 일을 못했다. 이날 잠깐 날이 갠 틈을 타 새벽부터 부지런히 움직여 20㎏ 남짓한 폐지를 수거해왔다. 그는 허리와 무릎이 안 좋아 남들처럼 리어카를 몰기엔 힘이 부쳐 작은 손수레로 폐지를 줍는다. 폐지 단가는 얼마 전까지 ㎏당 100원이었으나, 그새 값이 또 내려 이날 80원을 쳐줬다. 꼭두새벽부터 3시간 꼬박 일하고 손에 쥔 돈은 1,000원 한 장과 100원짜리 동전 6개. 고된 노동의 대가로는 적은 금액이었지만, 임씨는 허탕을 치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한 듯 손수레를 주섬주섬 챙겨 다시 거리로 나섰다.

자연재해가 사회취약계층에게 유독 피해를 준다는 사실은 여러 연구를 통해 입증됐다. 이번 폭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물난리에 가까운 집중호우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폐지 줍는 노인’의 삶을 사실상 파괴시켰다. 폐지 수거가 유일한 생계 수단인데, 장시간 비가 올 땐 야외 노동이 불가능한 탓이다.

임씨만 해도 공공일자리 사업으로 27만 원, 기초연금 30만 원 등 매달 60만 원 정도의 기본소득이 있다. 그러나 월세(40만 원)에 관리비 등 이런저런 공과금을 내고 나면 매 끼니를 해결하기도 쉽지 않다. 폐지를 주워 버는 돈이 ‘생명줄’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서울 지역에 폭우가 쏟아진 8일 오후 성북구 보문동 한 상점 앞에 흠뻑 젖은 폐지 더미가 수거되지 않은 채 방치돼 있다. 나광현 기자

서울 지역에 폭우가 쏟아진 8일 오후 성북구 보문동 한 상점 앞에 흠뻑 젖은 폐지 더미가 수거되지 않은 채 방치돼 있다. 나광현 기자

비는 폐지의 상품성도 크게 떨어뜨린다. 물에 젖은 폐지는 고물상에서 적게는 10%, 많게는 절반까지 무게를 빼 값을 치른다. 서울 신당동의 한 고물상 사장 정모(50)씨는 “저울에 물 무게까지 포함되니 제외하는 건 당연하다”고 말했다. 이어 “‘중상(中商)’이 젖은 폐지는 가격을 깎으니 우리 같은 ‘소상’도 어쩔 수 없다”고 푸념했다. 폐지 유통은 수집상이 노인 등 개인으로부터 폐지를 받아 중간 규모인 중상에 넘긴다. 중상은 다시 대상에 폐지를 팔고, 최종적으로 제지회사에 납품하는 다단계 구조다.

폐지 수집 노인들은 올해처럼 폭염ㆍ폭우가 반복되는 여름 날씨가 가장 힘들다고 입을 모은다. 서울 성동구에서 10년째 폐지를 줍는 윤모(70)씨는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면 아예 일을 접는다. 윤씨는 “물 먹은 폐지를 나르려면 힘은 배로 드는데, 고물상 맘대로 가격을 후려치니 몸만 축나고 남는 게 하나도 없다”고 토로했다. 예년 같으면 1, 2주 정도 장마가 지나가면 괜찮았는데, 올해는 공친 날만 한 달 가까이 된다.

이날 서울 신당동에서 만난 김모(82)씨는 운이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오전 7시부터 4시간 동안 신당동과 황학동, 창신동 일대를 훑어 100㎏ 넘는 폐지를 모았다. 가격도 아무 감량 없이 8,000원 제값을 받았다. 그는 어둑한 하늘을 쳐다보며 “비가 또 오기 전에 더 주워야 한다. 요즘처럼 비가 야속한 적이 없다”는 말을 남기고 위태로워 보일 만큼 빠른 속도로 리어카를 끌기 시작했다.

나광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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