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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잔다르크' 김명시 독립유공자 됐다... "여성운동가 더 조명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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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에도 '절대로 김명시를 잊으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는데, 드디어 명시 누나 이름을 크게 부를 수 있게 됐습니다."
김필두(84)씨가 감격에 찬 눈으로 말했다. 필두씨는 일제강점기 시절 21년간 독립운동에 매진해 '조선의 잔다르크'로 불린 김명시 장군의 외사촌 동생이다. 국가보훈처는 제77주년 광복절을 맞아 김 장군에게 건국훈장 애국장(4등급)을 추서한다고 12일 공식 발표했다. 김 장군이 1949년 42세 나이로 의문사한 지 73년 만에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것이다.
김명시(金命時).
낯익은 이름은 아니다. 김 장군은 항일 무장투쟁의 최전선에서 용감히 싸운 여성 독립운동가다. 1942년 조선의용군 여성 부대 지휘관으로 활약할 당시 독립신보는 그를 '백마 탄 여장군'으로 소개했다. 광복 후 그가 고국에 돌아와 서울 종로 거리를 행진하자 사람들이 "김명시 장군 만세!"를 외쳤다는 일화도 남아 있다.
1907년 5월 경남 마산에서 태어난 김 장군은 12세이던 1919년 3월 1일, 동네 어른들과 함께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일본 경찰의 무자비한 탄압을 목격하고 도망쳐 집으로 숨은 뒤 '다시는 도망치지 않으리라! 이 비겁함을 다시는 반복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고 한다.
그는 1925년 18세 때 러시아 모스크바로 유학을 떠났다가 1927년 중국 상하이에서 항일독립운동을 시작했다. 1930년에는 하얼빈 일본영사관 공격을 주도했고, 2년 뒤 국내에 잠입했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돼 혹독한 심문을 받고 7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중국으로 망명해 무장투쟁을 이어가다 1942년 조선의용군 여성 부대를 지휘하며 '여장군' 칭호를 얻었다.
광복이 되자 서울에서 활동하던 김 장군은 정부 수립 이후 거세진 이승만 정권의 좌익 숙청 작업 탓에 갑작스러운 최후를 맞았다. 1949년 10월 부평경찰서 유치장에서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기록만 남아 있다. 고문이 있었는지, 왜 체포됐는지, 시신은 누구에게 인계됐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렇게 '김명시'란 이름 석 자는 잊혔다.
2018년 김 장군의 고향인 마산의 시민단체 '열린사회희망연대'는 지역 독립운동가 발굴 사업을 시작하며 김 장군 친족 찾기에도 나섰다. 그해 말, 지역 일간지 등에 광고까지 냈지만 감감무소식이었다. 낙담하던 차에 2019년 2월과 7월 필두씨와 김미라(62)·미경(58)씨가 희망연대를 찾았다. 미라·미경씨는 김 장군의 종조카다.
사실 이들은 김 장군 친족을 찾는다는 광고를 진작 봤지만 한참 망설였다. 김 장군에게 덧씌워진 '빨갱이' 낙인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필두씨는 "어렸을 때 장롱 맨 밑에, 어머니가 신문지로 꽁꽁 싸서 보관하던 사진 한 장이 있었다"면서 "'누구냐’고 물을 때마다 '몰라도 된다'는 말만 들었는데 그게 명시 누나였다"고 했다.
미라씨 역시 "여고시절 툭하면 순경이 찾아와 '요즘 별일 없냐'고 아버지께 묻곤 했다. 취업이 됐다가 신원 조회에 걸려 일자리를 못 구한 사촌 오빠들도 있다"고 회상했다. 김영만 희망연대 상임고문은 "막상 김 장군 친족을 찾고 보니 같은 마산에 있어서 깜짝 놀랐다"며 "연좌제가 심해 조용히 숨어 지낸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가족끼리는 김 장군 얘기를 자주했다고 한다. 세 사람 모두 김 장군을 만난 적은 없지만 부모님으로부터 일화를 하도 들어 기억이 생생하다. 김 장군의 외삼촌이었던 필두씨 아버지는 생전 "명시는 만주, 상하이를 뛰어다니며 독립운동을 했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김 장군과 사촌 형제였던 미라·미경씨 아버지도 "변장에 능했고, 소리소문 없이 잠시 밤에 다녀갈 정도로 신출귀몰했다"는 일화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딸들에게 들려줬다. 미라씨의 남편 남무혁(70)씨는 "김 장군 얘기만 나오면 장인어른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고 기억했다.
지역사회도 김 장군을 기리기 위한 각종 사업을 꾸준히 진행해왔다. 2020년엔 마산합포구 오동동 문화광장의 김명시 장군 생가터에서 그가 다닌 성호초등학교(옛 마산공립보통학교)로 향하는 돌담 골목 70여 m 벽에 항일투쟁을 하던 모습 등을 그려 넣은 길이 개장됐다. 지난해 3월에는 마산제일여고 등 시내 여고생들의 손글씨가 담긴 '백마 탄 여장군 김명시' 그림책도 출간됐다.
김 장군의 독립운동 공적은 확실했지만 서훈 추서는 쉽지 않았다. 희망연대는 2019년 1월과 지난해 7월 보훈처에 독립유공자 포상 신청서를 제출했지만 연이어 반려당했다. '사망 경위 등 광복 후 행적이 불분명하다'는 이유였다. 김 장군 사망 당시 직책이 '북로당 정치위원'으로 표기됐는데 이게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한 근거가 된 것이다.
희망연대는 김 장군의 북로당 정치위원 행적은 거짓이라는 점을 알리는 데 주력했다.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한 사람이 묻히는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김 장군 이름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해 첫 서훈 신청 후 3년 7개월여 만에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보훈처는 "김명시 장군은 1931년 상하이한인반제동맹을 조직했고 이후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고 포상 사유를 밝혔다. 이 단체는 조봉암 등이 속했던 상하이 지역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모임이다. 이춘 희망연대 운영위원은 "이념이 독립유공자 선정 기준이 돼서는 안 된다"며 "한 독립운동가의 명예회복뿐 아니라 반쪽을 잃어버린 대한민국 독립운동사를 복원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맘 졸이며 결과를 기다리던 김 장군 친족들도 "마침내 김명시 이름 석 자를 공개적으로 입 밖에 낼 수 있게 됐다"고 기뻐했다.
다만 이들은 공적 내용에 항일무장투쟁 활동이 빠진 것이 아쉽기만 하다. 김 상임고문은 "영사관 습격이나 조선의용군 활동은 충분히 확인 가능한데 누락됐다"면서 "훈장 등급도 솔직히 기대에 못 미친다"고 했다.
친족과 희망연대의 다음 목표는 김 장군의 묘소를 찾는 일이다. 그러려면 김 장군 사망 직후 시신을 수습한 가족부터 확인해야 한다. 필두씨는 "누님이 묻힌 장소를 알게 되면 그곳의 흙이라도 가져와 가묘를 만들고 싶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김 장군 서훈을 계기로 우리 사회가 좀 더 적극적으로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발굴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국사편찬위원회가 공개한 서대문형무소 수형기록카드 4,837장 중 180명(3.72%)이 여성인 반면, 여성 독립유공자 비중은 2017년까지 1.38%에 불과했다. 여성운동가 2명 1명은 유공자 인정을 못 받았다는 의미다. 이후 여성 독립유공자 비율은 상승해 올해 3월 기준 3.28%로 조금 올랐다.
이윤옥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은 "여성 독립운동가는 ‘유관순' 열사 한 분만 유명하다"며 "학생, 노동자, 기생, 독립운동가의 아내 등 조국 독립을 위해 노력한 다양한 분야 여성들의 공적을 알리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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