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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를 앓으며 꿈꿨다, 포르토피노를

입력
2022.08.11 22:00
27면
이탈리아 포르토피노 ⓒ게티이미지뱅크

이탈리아 포르토피노 ⓒ게티이미지뱅크

난데없이 코로나에 걸려 여름휴가 대신 병가를 냈다. 일주일 꼬박 천장만 보며 끙끙 앓다 보니, 사람은 참 작고도 작은 것에 휘둘리는 약한 존재구나 싶었다. 두통이 심한 밤이면 가을의 여행계획이고 뭐고 다 귀찮다가, 남편이 끓여 준 뜨끈한 소고깃국 한 그릇에 또 배시시 살 것 같았다. 알 수 없는 구역질에 밤새 변기를 부여잡고 대체 뭘 잘못 먹었나 곱씹다가도, 또 다음날 가라앉으면 슬슬 허기가 밀려왔다. 중병에 비하면 슬쩍 건드리는 수준인 두통에도, 겨우 정상보다 몇 도 오른 체온에도, 이리 힘겨워하는 내가 참 보잘것없게 느껴졌다.

아픈 게 다 나쁜 건 아니었다. 바깥으로만 쏠려 있던 신경이 통증을 따라 내게로만 향하니, 안 들리던 몸의 소리가 들렸다. 평소 돌보지 않던 부분을 귀신같이 알아내 공격하는 통증을 따라가며 그간의 습관도 새삼 돌아봤다. 좋지도 않은 것들을 이리저리 퍼부으며 괴롭혔구나 싶었다. 열에 들떠 선잠을 자니 잊고 있던 사람도, 가고 싶던 장소도 꿈에 불쑥불쑥 나타났다. 아프지 않은 일상에서는 잊고 살았지만, 아마 그리웠나 보다.

그렇게 꿈에 나타난 내 맘의 보물상자는 이탈리아의 작은 항구 포르토피노(Portofino)였다. 누군가에게 아름다운 지중해 항구를 상상해 보라면 떠올리게 될 이상향 같은 마을. 부드럽게 파고든 해안을 따라 알록달록한 집들이 벽을 이루고, 그 집들이 그대로 비칠 만큼 투명하고 파란 바닷물에는 흰 돛을 단 작은 배들이 떠 있다.

바다 저편에서는 들여다보이지 않는 독특하고 폐쇄적인 지형이라 은밀한 휴가를 보내고픈 귀족들이 찾기 시작한 게 19세기 말부터. '은밀한' '휴가'라는 두 단어의 결합만큼 매혹적인 게 또 있을까? 그 바람을 타고 처칠이나 윈저공작 같은 고위인사와 험프리 보가트, 그레이스 켈리 같은 스타들이 모여들었고, 세기의 커플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리처드 버튼도 여기에서 밀애를 즐겼다.

'유럽에서 가장 매력적인 은신처'라는 명성을 만든 일등공신은 1922년에 나온 소설 한 권이었다. 항구 위 언덕에 있는 브라운성이 바로 그 소설 '4월의 유혹'의 배경인데, 성에 올라 항구를 내려다보면 짙푸른 숲에다 특유의 색감을 뽐내는 집들까지 눈에 들어오는 모든 풍경이 선명한 그림이다. 바다에서 밀려오는 바람에 모자를 놓치지 않으려고 힘껏 누르며 함박 웃었던 그 성벽 끝 테라스에서, 난 포르토피노와 사랑에 빠졌다. 다시 떠올릴 때마다 눈물이 찔끔 날 만큼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어쩌면, 아픈 내가 그리워했던 보물상자는 그곳을 같이 여행했던 엄마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아플 때면 어김없이 엄마가 끓여준 흰죽에다 무짠지를 올려먹던 기억이 포르토피노를 불러냈나 보다. 이제는 가끔씩 농담처럼, 탄식처럼, 영정사진을 준비해야겠다고 말하는 나이가 되어버린 엄마. 그날 성 앞의 벤치에 오도카니 앉아있던 지금보다 젊었던 엄마의 옆모습, 항구의 방파제를 따라 걸으며 "여긴 참 꿈처럼 예쁘구나" 감탄하던 목소리는 나에게는 영정사진과도 같이 영원히 기억할 순간이다. 그러니 여행이란, 언제 또 닥칠지 모를 삶의 팍팍함에 대비해 사랑하는 이와의 시간 하나를 박제해 놓는 것인가 보다. 온갖 고단함을 버티며 사는 우리들에게 휴가란, 인생이 씁쓸할 때 꺼내 먹을 수 있는 달콤한 사탕 하나를 만들어 놓는 것이니 말이다.


전혜진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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